[468호/사회탑] ‘증발된 범인’, 피해자만 남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참사 공론화 11년이 지난 지금, 책임지는 이는 어디에

2022-05-16     김재하 기자

지난 3일, 배구선수 출신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안은주 씨가 12년의 투병 끝에 사망하며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1,774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이후 전국적인 추모의 목소리와 함께 가습기살균제 참사 가해 기업들에 대한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한편 지난 3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는 참사 공론화 11년 만에 최종 조정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전체 금액의 절반 이상을 부담해야 하는 옥시레킷벤키저(이하 옥시)와 애경산업(이하 애경)이 조정안을 거부하며 합의가 무산되었다. 조정위는 두 기업과의 협의를 위해 활동을 연장하였지만, 피해자단체는 이에 반대하며, 보다 실효성 있는 피해자 구제를 촉구하고 있다.

 

◇ 가습기살균제 참사 1,774번째 희생자 발생 … 추모와 불매운동 확산

지난 3일, 전 배구선수이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안은주 씨는 쉰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안 씨는 2011년 옥시의 가습기살균제 제품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을 사용하다 쓰러져 폐렴과 원인 미상의 폐 질환 진단을 받았다. 이후 2015년과 2019년에 두 차례의 폐 이식을 받으며 12년의 투병을 이어오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한국환경산업기술원에 접수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7,712명 중 사망자는 1,774명으로 늘어났다. 안 씨는 생전 투병 기간에도 가습기살균제 피해에 대한 배상을 촉구하는 운동에 앞장서 왔다.

안 씨가 사망한 당일 오후,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서울 여의도 옥시 한국지사 앞에서 추모식을 진행하며 “안 씨는 피해 구제자로 인정됐지만, 옥시 측으로부터 아무런 배·보상이나 직접적인 사과를 받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이후 안 씨의 죽음을 추모하는 목소리와 함께 가습기살균제 참사 가해 기업인 옥시와 애경에 대한 전국적인 불매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그 가운데 울산환경운동연합을 비롯한 울산지역 32개 시민단체는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옥시와 애경이 조정위원회 권고안을 수용하고, 납득할 만한 조치를 취할 때까지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 두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 옥시·애경, 최종 조정안 거부 … 분담금 비중 재조정, ‘종국성’ 보장 요구

지난해 10월에 출범한 조정위는 지난 3월 가습기살균제 참사 공론화 11년 만에 최종 조정안을 내놓았다. 조정안은 9개의 가습기살균제 제조·유통 기업이 피해자 7천여 명에게 최대 9천2백억여 원을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 수가 가장 많아 절반 이상의 분담금을 내야 하는 옥시와 애경이 조정안을 공식 거부하며 사실상 합의는 무산되었다. 

두 기업이 조정안에 거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두 기업이 부담해야 할 분담금의 비중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두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분담금의 합은 전체 금액의 62%인 약 5천7백억 원이다. 두 기업은 특히 원료물질을 제조·공급한 SK케미칼의 분담률이 너무 낮게 측정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종국성’의 보장을 요구했다. 이때의 종국성이란 조정안대로 피해지원을 마치면 법적 책임은 완전히 소멸되며, 더는 기업에게 추가적인 부담을 지우지 않는 것이다. 지난달 30일에 해산이 예정되어 있던 조정위는 옥시와 애경을 제외한 나머지 7개 기업의 요청을 받아들여 활동기간을 연장하였다. 조정위는 두 기업과의 협의를 지속하고, 종국성 문제와 관련해 정부·국회와 협의를 진행하겠다는 방침이다.

 

◇ 조정위 활동 연장에 반발하는 피해자들 … 국가의 책임 인정, 특별법 재개정 촉구

그러나 조정위의 활동기간 연장에 대해 반대하는 피해자단체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지난 11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단체 ‘빅팀스’는 “조정위와 가해 기업이 피해자 의견을 묵살하고 합의를 종용하기 위해 조정위를 연장하는 것은 폭력행위”라며 “피해자가 충분히 보장받을 수 있도록 시행령으로 국가책임 손해배상을 고시하지 않는다면 조정안을 거부하겠다”라고 밝혔다. 구속력 없는 사적 합의 기구인 조정위의 활동을 연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국가의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고 가습기살균제 특별법을 재개정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가습기살균제 특별법은 지난 2020년 피해자 범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한 차례 개정된 이후 특별한 논의가 없는 상황이다.

2011년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수면 위로 드러난 이후 현재까지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신현후 옥시 전 대표는 형기 6년을 마치고 지난 12일 만기 출소했다. 이날 신 전 대표는 “조정안 거부가 영국 본사 방침인가”라는 피해자들의 물음에 “모르겠다”라고 답했다. 여전히 피해자단체와 시민사회단체들은 불완전한 배상과 더불어 검찰의 부실 수사,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을 비판하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피해는 끝나지 않았다. 기업과 국가가 그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충분한 배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 모두의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