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호/독자의 시선] 새로운 세계관

최의강 (물리교육·16) 학우

2022-04-18     한국교원대신문

과학을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관을 새로 가지는 것을 포함한다. 국가, 사회, 제도, , 경제 체계 등의 인류가 만든 문명의 산물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자연스레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문명이 없는 자연 상태를 상상해 볼 기회가 별로 없고, 인간의 활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활동이나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원자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사실은 누군가에겐 그냥 아무런 자극이 없는 말일 수 있겠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 사실은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 큰 관점을 시사한다.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책상 컴퓨터 등을 구성하는 성분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 원자의 존재를 확신하고 이를 구성하는 체계나 원리가 밝혀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00년대 초반에 양자역학이 시작되고 비로소 원자 수준의 규모에서 만족하는 원리들을 쌓았으며 이 원리들은 인간의 직관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 직관들이 무엇이고 어떤 이유로 직관과 맞지 않는지 전달하면 좋겠지만 이는 기나긴 설명을 요하는 일이기도 하다. 더불어 필자의 학식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한 측면도 있다. 그래서 이를 조금이나마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해 수업을 듣던 중 내 직관으로는 너무 이해되지 않아 질문을 했고, 그에 대한 교수님의 답이었던 우주가 우리의 직관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대로 이루어져 있을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이에 관한 다른 예는 시공간에 관한 것인데 칸트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선험적인 지식이라고 했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경험과 어떤 능력 없이 알 수 있다는 뜻인데 우리의 경험상 이는 꽤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이 세계관을 아인슈타인이라는 과학자가 뒤집는 일이 생기고 이에 관한 것이 상대성 이론이다. 이 또한 필자의 학식 부족으로 많은 것을 생략하고 넘어가겠다. 말하고 싶은 바는 결국 자연은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학은 인간적인 가치에 관한 일들을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과학적 사실 속에 인간에 관한 철학적 고찰들을 할 만한 요소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형성하는 가치관은 대개 그 사람의 직접적인 경험에 의존한다. 사람마다 다소 편차가 있겠지만 이 경험의 규모, 다시 말해 만나는 사람들의 특성, 숫자, 교육환경, 경험하는 문화의 종류 등은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는 간접경험(영화, 책 등)들로 채워지곤 한다. 과학을 통해 이러한 경험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 여러 사례를 소개하겠다.

어떤 현상에 대해 자연스럽다, 부자연스럽다라는 판단은 앞서 말한 경험에 의존한다. 그로 인해 관점에 따라 누군가에겐 자연스러운 일들이 누군가에겐 부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나의 사례로 동성애를 들 수 있는데 인간이 보통 경험하는 규모에 국한해서 보자면 동성애를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것이 사회적으로 형성되었으며 부정되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관을 좀 더 확장해서 다른 동물들도 경험의 규모에 넣게 되면 동성애를 하는 다른 동물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동물들의 행위를 관찰하여 우리가 해석한 것이지만)

무엇을 본다라는 것의 의미도 과학을 통해 확장될 수 있는 개념 중 하나다. 이를 이해하려면 앞서 말한 원자가 양성자와 전자라는 전하를 띠고 있는 입자임을 이해해야 한다. 같은 전하를 띤 입자끼리는 척력, 다른 전하를 띠고 있는 입자는 인력이라는 상호작용을 한다. 우리가 물질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은 물질과 우리가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밝혀진 바로는 자연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상호작용은 네 종류가 전부다.

이와 별개로 우리가 보는 빛은 전자기파다. 전자기파는 전기장과 자기장의 진동이고 전하를 띤 입자는 전기장에 있을 때 힘을 받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가시광선을 보는 것인데 이는 전자기파의 수많은 종류 중 특정 영역대의 파장에 해당하는 빛만 보는 것이다. , 우리 주변에 수많은 전자기파가 있고 그중 가시광선에 해당하는 전자기파만 우리 눈을 구성하는 로돕신이라는 분자가 크게 반응해서 이것이 전기신호로 전달된다. 좀 더 확장해서 우리가 보는 것,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모두 물질이 비물질적인 것을 만드는 과정이다.

앞선 과학적 사실을 고찰해 보면 다른 생물들은 꽤나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다른 파장대에 해당하는 전자기파를 본다거나 아니면 같은 영역대의 파장에 해당하는 전자기파를 보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는 것 등을 말이다.

실제로 동물은 아니지만, 우리가 무엇인가를 본다는 의미는 점점 확장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원자를 보거나 DNA를 본다고 할 때 본다는 의미는 우리가 평소에 어떤 것을 본다는 것과 약간은 다른 의미다. 실제로 원자와 DNA가 어떤 그 물체에 반사되는 가시광선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블랙홀의 관측도 이것의 연장선에 있다. 블랙홀을 실제로 관측하는 것이 아니라 블랙홀로 인해 생기는 부수적인 현상을 보는 것이다. 단지 다른 방법으로 대상을 인지하는 것이다.

과학을 배운다고 당신의 삶이 개선된다고 하진 못하겠다. 다만 과학을 배우면 당신이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질 것임은 확신한다. 영화 가타카를 보면 우주탐사를 하는 것이 꿈이었던 주인공이 결국 사회의 편견과 자기 능력의 한계를 가로질러 꿈을 이룬다. 주인공은 지구를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행복할 수 없는 곳이지만 떠나기 싫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몸속의 모든 원소도 우주의 일부라고 한다. 어쩌면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