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호/사회기획]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큰 사건”에 은폐된 사실들 (1)
침공의 역사적 흐름, 그리고 평화를 위한 관점
◇ 러시아의 침공은 연속적인 역사 흐름의 일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월 24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에서 특수 군사작전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비단 올해만 아니라 과거도 살펴보아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반인륜적 행위, 우크라이나의 러시아에 대한 악감정의 근원은 소련 시절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진다. 러시아의 인근 국가 수탈, 침공, 간섭은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국제정세적으로 연속성을 가진다.
스탈린이 농장 집단화를 추진하며, 기존에도 소련 공산장 지시에 맞서려던 우크라이나에서 1932~1933년 극심한 대기근에 발생하였다. 우크라이나 농민이 태업 등으로 저항했지만 소련 당국은 곡물 징발을 강화하며 우크라이나 기근을 심화하였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식품 수송 루트를 차단하기까지 했다. 유엔은 굶주림이나 합병증 등으로 인해 700만~1,0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추산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는 이 전체를 근거로 하여 대기근이 홀로모모르(Holodomor), 즉 일종의 제노사이드로 부른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며 우크라이나가 분리 독립한 후에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소련 해체로 독립한 러시아, 벨라루스 등이 국가연합체 독립국가연합(CIS)를 창설하였다. 그런데 창립 멤버였던 우크라이나는 CIS 정상회담의 CIS 강령에 서명하지 않으면서 회원국이 아닌 참여국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와의 갈등을 지속한 후 2018년 5월 탈퇴를 선언하면서 친유럽(서방) 성향을 드러내었다.
나토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창설됐지만 현재까지 유지되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큰 이유가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 2019년에는 헌법에도 나토 가입을 국가 목표로 설정하면서까지 나토 가입을 추진했다. 러시아는 친서방 군사 동맹인 나토가 동진하지 말라며 우크라이나를 지속적으로 압박하였다. 동진에 저항하는 러시아의 태도는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의 말, 독일문제에 관한 최종 해결 조약 내 문구에 대한 자국의 해석에 따른 것이다. 결국 나토 동진에 대한 저항은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드러났다.
이번 침공은 두 국가 간 관계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내부 분열과도 연관되어 있다. 우크라이나는 드네르프강을 기준으로 예전에 분열 지배되었던 역사 때문에 동서가 각각 친유럽(서방), 친러로 성향이 상이하다. ‘오렌지혁명’은 동서 분열의 대표적인 사례다. 동서 대결 양상으로 전개된 2004년 대통령 선거에서 친러 후보인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승리하였다. 그런데 해당 선거가 부정선거였음이 밝혀지자 시민들은 거리를 오렌지색으로 물들이며 시위에 나섰다. 시위를 통해 재선거하여 친유럽 후보인 유센코가 당선되었다.
유센코의 임기 이후 야누코비치가 2010년부터 대통령직에 올랐다. 야누코비치는 2012년부터 EU 가입을 위해 협상하였으나 러시아의 압박에 EU 가입에 서명하지 않고 망설였다. 2013년 11월 하순이 되어도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자 시민들이 이에 분개해 시위를 벌였다. 이를 유로마이단 시위라 한다. EU 가입 관련 동서 여론이 극명히 갈렸음에도 평화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며 시위는 내전 양상으로 치달았다. 결국 2014년 2월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었고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림반도에서는 또 다른 난항이 계속되었다. 친러 지역인 크림자치공화국에서는 임시정부 반대 집회가 지속되었고, 러시아 특수부대가 의회와 정부청사를 차지했다. 이후 총리로 당선된 친러 인물 야쇼노프는 러시아의 군대 지원을 요청했고, 푸틴은 이에 응답해 무장병력을 크림반도에 투입했다. 이후 크림자치공화국 의회와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국을 선포하고, 러시아는 크림공화국과의 합병 조약을 비준하며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크림반도가 합병되면서, 우크라이나에서의 분리·독립을 요구했던 친러 지역인 돈바스에서도 러시아로의 합병 요구 시위가 지속되었다. 이후 격해져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돈바스 친러 반군 간 교전, 즉 돈바스 전쟁이 발발되었다. 전쟁 발발 이후 돈바스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 분리된 나라로서 도네츠크 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LPR)이 수립되었음을 자체적으로 선언하였다. 전쟁이 가라앉질 않자 2014년 9월, 2015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민스크협정을 체결해 휴전하려고 하였으나 협정 내용은 양측 모두가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지속된 돈바스 전쟁은 결국 지난 2월 러시아 정규군도 참전한 전면전으로 확장되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이렇게 간섭하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데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다른 나라가 아니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푸틴은 2021년 7월 12일 발표한 기고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통일성에 대하여(On the Historical Unity of Russians and Ukrainians)”에서 이런 인식을 여실히 드러낸 바 있다. 우크라이나가 주권국가라는 점을 부인한 것이다. 지난 2월 21일, 우크라이나 영토 안의 DPR과 LPR을 독립국으로서 인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인이 고통받는다는 이유로 침공하였다. 러시아는 이를 통해서도 우크라이나 침공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 단지 러시아만 악마화되어선 안 된다
러시아 은행의 SWIFT 퇴출 등 경제 제재를 가하거나 러시아의 침공을 비난하는 국가들의 만행도 흔히들 은폐되어 드러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를 러시아·미국·영국 등의 서명하에 체결하였다. 당시 기준 우크라이나의 핵 보유량은 세계 3위였는데, 이 핵을 포기하는 대신 국가 안전과 주권 보장, 경제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미국은 크림반도 합병 때 방관하기만 하였으며, 각서의 조문도 빠져나갈 부분이 많고 표현 수위도 낮다. 비핵화를 대가로 한 약속이 무너졌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 발생의 맥락에 미국은 직간접적으로 원인을 제공하였다. 러시아는 나토 동진을 일찍부터 경계했는데, 미국은 나토를 해체하기보다 오히려 1997년 동진 의사를 밝혔고, 1999년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도 나토에 가입시켰다. 2008년에는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목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어진 과정의 반정부 세력에 미국 정부가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리고 워싱턴포스트는 2021년 12월 3일, 미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예상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는데, 그럼에도 사전에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는 나라들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는 비판도 잇따른다. 단적인 예로 우리나라와 미국만 해도, 러시아와 크게 다르지 않게 여러 테러와 전쟁을 지원하고 있다. 미국은 소말리아를 상대로 지난 8월까지, 그리고 2월 하순부터 다시 포격하며 피해를 주고 있다. 또한 미국과 이란의 대리전 양상까지 비화된 예멘 내전은 7년 이상 지속되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는 예멘 전쟁의 사우디와 UAE를 군수산업의 최대 고객으로 두고 있으며, 우리나라가 인도네시아에 수출한 무기는 인권 억압과 혐오 범죄를 자행하는 데 쓰인다. 러시아를 비판하는 주체가 은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