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호/기자칼럼] 연대하기 위해서 기민해지자
며칠 전,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창가 자리를 사수하는 것에 실패해서 창밖 대신 버스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버스 요금표에 적힌 ‘일반인’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잘만 타던 버스가 낯설게 느껴졌다. 늘 청소년 요금만 보느라 몰랐던 탓이다. 일반인이라는 단어를 발견하자마자 한 가지 질문만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나는 언제 일반인이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질문이 선행된다. 일반성과 특수성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일반인을 ‘특별한 지위나 신분을 갖지 아니하는 보통의 사람’ 혹은 ‘어떤 일에 특별한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특별은 ‘보통과 구별되게 다른’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보통은? ‘특별하지 아니하고 흔히 볼 수 있음. 또는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아니한 중간 정도’라고 명시되어 있다.
특별과 보통, 일반의 밀접하고 모호한 관계 속에서 열등이라는 단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일반’이라는 단어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는 단어는 역설적이게도 열등이다. ‘일반인’이라는 표현의 맹점 역시 열등하다는 단어에 있다. 일반인은 열등하지는 않지만 우월하지도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일반인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나 또한 자신을 정의할 때 일반인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어쩌면 ‘일반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낯섦은 여태껏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특별성에만 집중해 왔다는 점을 방증한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나는 어느 부분에서는 ‘일반인’이다. 스무 살이 되어 성인 요금을 내며 버스를 타고 다니고, 각종 나이 제한에서 벗어나 있다. 비장애인이고 사회 제도가 규정해둔 성별 이분법 안에서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본인의 일반적임에는 둔감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자신을 거창하게 소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스스로가 겪은 부당함에는 거대하게 분노하면서도 사회 먼 곳에서 일어난 문제들에는 뉴스를 읽고 안타까운 일이라며 종이를 덮는 것에 그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인이라는 단어는 제도와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는 개인을 말한다. 사회는 일반이라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을 열등하다고 규정해 배제한다. 혹은 배제될 수밖에 없는 제도로 사람을 열등하게 만든다. 우리나라의 결혼제도가 그 예다. 대한민국법원 전자민원센터에 들어가 혼인 항목을 보면 ‘혼인이란 영속적인 생활공동체를 위하여 법적으로 인정된 남녀 간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쓰여 있다. 혼인 신고를 해 결혼제도 안에 속한 사람들은 ‘일반인’으로 아무런 불편함 없이 생활할 수 있지만, 그 제도 밖에서 대안 가족을 꾸리거나 동성 간 결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일반인은 그 차별에서 벗어나 있다. 모든 존재는 각자 특별하다는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모든 사람은 일반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영리해져야 한다. 단순히 내가 당한 차별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지, 누가 어떤 식으로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지 기민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고민의 끝은 ‘일반인인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았는지’로 확장되어야 한다.
단순히 누군가를 차별하지 말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정상성을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별함에만 집중할 때는 지났다. 스스로만 생각하다 보면 연대 없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연대는 어떠한 사람이 부당한 일에 처했을 때, 안정감과 소속감을 주는 보호 장치가 되어 준다. 이러한 연결고리가 없는 저항은 소모적이고 무력하게 끝날 뿐이다. 연대의 시작은 나 자신이다. 스스로의 정상성을 돌아보고 연대할 때, 정상성은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