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호/사회칼럼] 일하다 죽지 않는 세상, 그 당연한 권리를 위해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이조은 선임간사

2021-05-17     한국교원대신문

2021422, 평택항에서 일을 하던 청년노동자 고 이선호님이 300킬로가 넘는 컨테이너에 깔려 숨졌다. 고 이선호님은 안전신호 업무를 담당하는 신호수도 없고, 안전관리자도 없고, 안전모도 없는 환경에서 일했다. 누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환경이었다. 추모제에서 이선호님을 추모하며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2016년 서울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점검하다 숨진 청년노동자 김군, 2018년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설비를 점검하다 숨진 하청노동자 김용균님, 그들의 죽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위험업무를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위험의 외주화, 엉성하고 허술한 안전보건 관리체계 등으로 반복되는 산재사고는 끔찍한 대량참사도 야기한다. 20204월 경기도 이천의 물류창고 건설현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38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지난 2008년 냉동물류창고 화재로 40명이 목숨을 잃은 사고와 판박이었다.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는 일 년에 2천여 명. 매일 일터에서 7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사망한다.

산재사고를 줄이기 위한 노동시민사회의 노력 끝에 두 개의 주요한 법이 개정·제정됐다. 죽어간 노동자가 흘린 피로 만들어진 법이다. 하나는 201812월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이다. 28년 만에 전면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에는 위험의 외주화를 일부 방지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유해·위험한 작업의 도급이 금지되고, 산업안전보건법의 적용을 받는 대상이 확대되는 등 여러 부분에서 진전된 내용이 담겼다. 노동자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방안을 산업안전보건법에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개정이었다.

하지만, 국회에서 법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정부발의안 보다 내용이 후퇴됐다. 도급인이 안전보건 조치를 책임져야 하는 범위가 축소되었고, 처벌 수위는 낮아졌다. 법은 개정됐지만 고 김용균님의 업무와 구의역 정비노동자 김군의 업무는 여전히 도급 금지 대상이 아니다. OECD 국가 중 산재사망률 1위라는 현실을 개선하기에는 미흡한 개정이었다. 실제로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된 이후에도 산재사망률은 아직 떨어지지 않고 있다.

두 번째 주요한 법은 올해 1월에 제정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안전·보건 조치의무를 위반하여 인명피해를 발생하게 한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의 처벌을 규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노동시민사회가 법제정 요구한 지 15년 만에 만들어졌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은 산재·시민재난 참사가 기업이 안전·보건 책임을 다하지 않아 일어난 범죄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경영책임자가 중대재해에 대한 책임과 처벌을 지게 함으로써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졌던 산업재해 예방을 강화할 유인을 높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또한 국회에서 논의되는 과정에서 내용이 후퇴됐다. 산업재해가 빈발하는 5인 미만 사업장에 법적용이 제외되었고, 50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이 유예되었으며, 인과관계 추정 도입과 불법인허가와 부실한 관리감독을 한 공무원 처벌 도입이 이뤄지지 않는 등 반쪽짜리 법으로 제정됐다. 이마저도 정부가 조만간 발표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령이 법 취지를 훼손하거나 후퇴하는 방향으로 않을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이 전면개정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됐다고 당장 산재사망사고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한 중요한 디딤돌을 이제 겨우 마련한 것일 뿐이다.디딤돌이 단단히 박힐 수 있도록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령이 제대로 마련되어야 하고, 두 법이 사회에 온전히 뿌리내려야 한다. 두 법을 계기로 한국사회의 산업안전보건체계의 기틀을 다시 짜는 법제도 논의도 이어져야 한다. 노동자가 죽지 않는 것, 안전한 일터에서 건강하게 노동하는 것은 노동자의 권리다. 이 마땅한 권리가 지켜지고 노동자의 땀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