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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호] 찢어낸 내 자아의 다른 얼굴, 사라 바트만

이석호(카이스트) 교수l승인2016.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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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바트만이라는 한 여인이 있었다. 이백 여 년 전 남아프리카에서 일명 부시먼이라 불리는 코이코이 족의 딸로 태어났다. 유독 돌출한 둔부 때문에 유럽에서 인종전시를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하는 영국인 군의관을 따라 대서양을 건넌다. 여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유럽 여성들과 다른 신체를 가졌다는 이유로 여인은 당시 제국주의 유럽의 인종학자와 박물학자 그리고 인류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다. 
한때, 여인은 여신이었다. 보티첼리의 육감적인 비너스를 능가하는 여신이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에게는 없는 두 가지 과잉 때문이었다. 앞치마 살이라 불리는 거대한 소음순이 그 하나요, 큐피드가 낮잠을 자기에도 넉넉한 준봉처럼 솟은 둔부가 그 둘이었다. 혹자는 여인의 두 가지 과잉을 불량한 진화의 증표라 공연했다. ‘인간이 멈추고 동물이 시작되는 자리‘라 칭하였다. 하여 여인의 과잉은 기실 결핍이었다. 과잉이 결핍으로 발명되는 순간이었다. 여인은 다시 불완전한 인간, 불충분한 인간, 평균 이하의 인간, 짐승 같은 인간, 유인원 같은 인간으로 둔갑하였다. 여인은 ‘인간’이라는 두 글자로는 어딘지 모르게 설명이 시원치 않은 ‘별종’이었다.
피카딜리는 뜨거웠다. 열대에서 막 상륙한 인류의 “먼 친척“을 구경하려고 불원천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인은 상륙한지 불과 6개월 만에 피카딜리의 만화경을 순식간에 접수했다. 관객들은 감동했다. 주머니 속 쌈짓돈이 아깝지 않았다. 세상에서 키가 제일 큰 파키스탄 남자를 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발이 기형적으로 휘어진 중국 여자 그리고 피부색이 허옇게 탈색한 알비노 증후군 환자들을 보며 느낀 역겨운 감동은 새발의 피였다. 무릇 박물관의 새로운 경지가 열리는 듯했다. 관객들은 흐뭇했다. 런던에서 태어나 “먼 친척“을 훔쳐보는 일이 못내 흥겨웠다. 저물어가던 노예제의 형해를 다시 껴안은 듯 속이 다소 거북하면서도 통쾌했다. 마음 속 도덕률과 박애주의 선언문이 대서양을 건너는 노예선처럼 끝 모르고 출렁거렸다. 그렇게 런던의 관객들은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을 달래기 위해 하루가 멀다하게 여인의 과잉을 경탄했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하게 성경을 앞세우고 교회 문을 두드렸다. 런던은 그렇게 여인을 사이에 두고 관객과 시민이 이율배반적으로 충돌하고 또 화해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인의 신성은 파리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파리는 자유, 평등, 박애의 실험실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아름다운 그 실험의 대상이 아니었다. 여인은 예외였고, 열외였다. 여인의 두 가지 과잉은 자유, 평등, 박애의 땅에서도 박해의 대상이자 결핍이었다. 비너스를 압도하던 여인의 육체가 호오의 대상으로서 낭만적 성상의 지위를 박탈당했기 때문이었다. 파리는 여인의 육체에서 냉정하게 감각의 거품을 거둬냈다. 그리고 그 육체를 고독한 해부학 그리고 자연사의 대상으로 영토화했다. 여인의 육체는 이제 “먼 친척”이 환기하던 정서적 혹은 심정적 연민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남국의 풀과 나무 그리고 코끼리와 사자의 육체와 동일한 것이었다. 여인에게 파리는 저주이자 악몽이었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기시감이었다. 파리에서 두 가지 과잉은 심미적 최후를 맞았다. 전설적인 앞치마 살과 둔부는 ‘기괴하다’ 혹은 ‘흉측하다’라는 심미적 판단을 중지시켰다. ‘너무 커서 인간의 것이 아니다‘라는 식의 과학적 판단만을 무성케 했다. 과학적 인종차별의의 신호탄이었다.
여인을 ‘인간’이라는 종적 지위에서 끌어내리는 데 복잡한 담론은 필요치 않았다. ‘과학’ 하나면 충분했다. 과학은 앞치마 살과 비대한 둔부를 열등한 육체의 전형으로 읽었다. 남국의 고릴라들 그리고 북국의 창녀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신체적 흔적이라고 읽었다. 과학은 여인의 작은 뇌도 가만 두지 않았다. 기어이 그 뇌의 크기를 문제 삼아 추상력의 결핍으로 몰아 세웠다. 이렇게 과학은 여인의 신체를 정치적으로 독해왔다. 하여 자유, 평등, 박애의 수사를 특정한 신체만의 몫으로 할당했다. 여인의 신체에 할당된 몫은 없었다. 여인의 신체는 반대급부였다. 자유, 평등, 박애가 결핍된 신체의 알리바이였다. 
파리는 관객의 눈이 아닌 과학의 눈으로 여인의 몸을 유린했다. 여인은 따뜻한 관객을 원했지만, 관객은 차가운 과학을 원했다. 과학이 규정한 열등한 몸을 일말의 죄의식 없이 하나하나 뜯어보고 싶었다. 하여 루소의 집에, 볼테르의 집에 노예라는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의 존재감을 무시하고 싶었다. 혁명을 이끈 자유, 평등, 박애의 서사가 이들로 인해 훼손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과학은 관객의 욕망을 마음껏 대리했다. 과학은 관객에게 최종심급이었다. 과학의 탈선을 끝내 견디지 못한 여인의 육체는 스물다섯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관객의 욕망을 대리한 과학이 마침내 메스를 들었다. 여인의 몸에서 앞치마 살을 들어냈다. 데카르트 것보다 작을 것이라고 추정하던 조그만 뇌도 도려냈다. 크기를 재보니 별반 차이가 없었다. 껍데기만 남은 몸에는 밀랍을 발랐다. 박제의 여인이 이내 미라로 부활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로, 이집트의 네페르티티로 화려하게 살아난 것이 아니었다. 칼라하리 사막에 부는 모래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떠도는 부시먼의 한 딸로 초라하게 되살아났다. 생식기와 뇌를 적출당한 여인의 몸은 그렇게 박제로 부활하여 그 후로도 약 이세기 가량 제국 관객의 관음증적 욕망을 부추겼다.
바로 그 여인이 백 구십 이 년 만에 귀향을 했다. 새로 갓 태어난 나라의 국기를 당당하게 휘장으로 두르고도 여인은 그 흔한 한 마디 말도 없었다. 여인에게 헌시한 조시가 궂은 날씨보다 더 짓궂게 낭송되는 가운데, 좀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아프리카 인들의 어깨가 잔잔한 파도가 되어 넘실거렸다. 나, 당신을 고향에 모시러 왔나이다, 고향에! / 그 너른 들판이 기억나시는 지요, / 커다란 너도밤나무 밑을 흐르는 빛나는 푸른 잔디를 / 기억하시는 지요?’
여인은 내게 은유다. 이백 여 년 전 아프리카라는 특수한 공간을 살아낸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안에서, 내 밖에서, 내 옆에서 무한복제를 거듭하며 되살아나는 도플갱어다. 찢어진 내 자아의 다른 얼굴이고, 남자라는 이름의 제국이 거느리고 있는 최후의 식민지며, 그 초라한 제국이 적멸을 늦추기 위해 휘두르는 채찍이고, 그 뭇매를 묵묵히 견뎌내는 육체다. 내게 여인은 조세핀 베이커이고, 마를린 먼로이며, 미스 사이공이고, 마담 버터플라이다. 내게 여인은 마돈나이자, 오프라 원프리이고, 잔다르크이자, 소녀시대다. 내게 여인은 이들 인격들에게서 이야기를 박탈하고 그것을 백치미와, 관능미 그리고 성스러움으로 호출하는 단순한 이 시대의 상상력이다.


이석호(카이스트) 교수  knue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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