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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호] 잔인한 가정의 달

편집장l승인2016.05.09l수정2016.09.21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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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이었다. 우리학교에서 열린 색동잔치엔 동네 어린이들이 엄마아빠 손을 잡고 참여해 신나게 놀다갔고, 전국 이곳저곳에서도 어린이를 위한 잔치가 한창이었다. 임시공휴일인 다음날과 연이은 주말까지 황금 같은 연휴에 다들 가족을 만나러 떠났고, 학교는 조용했다. 휴일인 걸 하늘도 알았는지 전날까지 세차게 불어대던 바람도 그쳤다.

화창한 봄날, 웃음 띤 사람들의 얼굴.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날이었지만 명확히 대비되는 장면이 있었다. 오전 10시, 북적대던 서울 고속터미널역 계단 한편엔 한 노인이 종이갑을 손에 든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하도 푹 숙인 얼굴과 쭈그린 몸 때문에 지금까지도 성별은 모르지만 머리가 짧았던 것으로 보아 당시엔 할아버지라 칭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약속 시간이 남아 그 옆에 머물러볼 수 있었다.

그는 아침 9시에 왔고 2시까지 있다 갈 것이라 했다. 서울역이나 쪽방에 사는데 기초생활대상자 지원수급을 받아 생활하고 있고, 가족은 따로 없다. 내 질문에 말 대신 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 대답해주었다. 글자가 눈에 나타나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글씨체가 지금 대학생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쳐다보는 눈빛에도 마냥 힘이 없진 않았는데, 분명 젊은 시절 학교도 다녔고 강단 있게 살아왔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계단으로는 연인과 친구를 만나러 가는 사람들, 엄마 손을 붙잡은 아이들이 지나갔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엔 그들과 같은 인간이 버젓이 있었다. 행인들은 모두 각자의 세계에 충실할 뿐이었다. 옆으로 비켜나와 ‘노숙인 센터’를 검색했다. 거리지원, 주거지원, 일시보호시설 등 메뉴는 많았으나 그 어떤 것도 이 노인을 구제해줄 순 없어보였다. 이곳 직원들도 휴일이니 대부분 자리를 비웠을 테다.

그를 지나친 나는 북적대던 길거리를 걸었고 점심으로 스테이크를 먹었다. 오후 2시였다. 5시간 내내 쭈그렸던 몸을 일으키고 그가 서울역으로 혹은 쪽방으로 향했을 시간이다. 인간에겐 분명 계급이 있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모든 생명은 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따뜻한 말들은 널렸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직도 누군가에겐 지옥이다.

니체는 오늘날처럼 ‘동정적인 사람들을 선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시대를 지배하는 도덕적 유행일 뿐이라고 말한다. 반대의 유행이 한때 그리고 오랫동안 지배했던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도 기업의 사회공헌이 확산되고 빈민구호단체가 번성하지만 역으로 우리나라 절대 빈곤층과 지구촌 빈민층은 고착, 확대되고 있다. 이처럼 때로 도덕은 현실의 제도를 보호하는 값싼 장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116쪽 인용)

그러나 천 명이, 만 명이 굶어죽거나 자살하는 엄청난 비극이 생기면 국가가 나서서 싹 해결할 것이고 가장 효과적일 테니 그전까진 무시하는 게 진짜 답일까.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이미 비극은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선 이미 한 시간이 지나기도 전 에 누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각 대학의 게시판엔 삶의 무게에 짓눌려 괴 로워하는 청년들의 글이 끝없이 올라온다. 무엇이 도덕적인가를 떠나 분명 한 것은 지금 바로 옆에 마지못해 사는 사람이 있고, 텅 빈 방에 남아 적막과 사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5월은 자살률이 가장 높은 달이다. 어린이를 위한 날과 어 버이, 스승을 위한 날이 모여 있는 달에, 다른 이들의 고마움을 알고 감사하는 달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편집장  knue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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