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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회/평론 가작]

김용원(물리교육09)l승인201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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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라!(Rise!-Dashi Basara!)

-판도라 상자와 배트맨 이야기 혹은 아테네와 예루살렘 이야기-

 

김용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3부작으로 이루어진 배트맨 시리즈에서 저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 편만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단순한 히어로물로 취급되던 ‘배트맨’은 놀란에 의해 ‘철학적인 요소’까지 가미됨으로써 히어로물이지만 전혀 히어로물답지 않게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다크 나이트’에서는 절대악이라는 ‘조커’가 압도적으로 영화를 지배함으로써 ‘놀란의 배트맨시리즈’의 특색에 비로소 정점을 찍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많은 기대를 받고 세상에 나온 ‘라이즈’는 칭찬도 있었는가하면 혹평도 있었는데, 저는 혹평보다는 ‘라이즈’의 내용을 옹호하고자 하는 측에서 이번 평론을 썼습니다. 세세한 영화적인 측면이라던가 기법을 다룰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다소 독특하게도 철학적-내용적인 측면에서 이 영화를 재구성해보았습니다. 이것을 ‘평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저 자신조차도 다소 의아하지만 이러한 구성이 특히 ‘라이즈’에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제 임의로 이렇게 짜보았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오로지 하나의 주제만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는데 그것은 ‘희망’입니다. 따라서 저의 글의 전개는 다음과 같습니다.

 

Ⅰ. 희망

ⅰ. 판도라 상자의 진짜 진실

ⅱ. 고담시의 판도라 상자

 

Ⅱ. 희망 없는 자들

ⅰ. ‘라이즈’가 다른 전편들과 다른 점

ⅱ. 희망하는 자는 절망한다

 

Ⅲ. 희망 없는 자들의 희망

ⅰ. 절망하는 자는 희망한다

ⅱ. 판도라 상자를 열어본 배트맨

ⅲ. 전설이 끝난다(The Legend ends)

 

 

Ⅰ. 희망

ⅰ. 판도라 상자의 진짜 진실

 

저희가 아는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프로메테우스(미리 내다보는 자)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늦게 보는 자)의 부인 판도라가 신들이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고 했던 상자를 금기를 어기고 열어보았더니 사실 그 안엔 정말로 사람들을 행복하기 위해 온갖 불행들을 붙잡아 놓고 있었고, 상자를 열자마자 그 불행들이 뛰쳐나갔다는 이야기. 그래서 그 불행들은 사람들 사이로 퍼져서 사람들은 그때부터 불행해지기 시작했고, 판도라가 급하게 상자를 닫았는데 그 상자 중에 한 가지 나가지 않은 게 있었으니 그것이 ‘희망’이였다고. 그래서 인간들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지만 그래도 희망이 인간에게 남아 있게 되어 삶을 지탱할 수 있게 되었다고.

여기까지가 보통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실은 좀 더 잔인합니다.

대부분의 판도라 상자의 이야기를 전하는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그 상자는 분명 ‘온갖 이 세상의 불행을 담은 상자’라고 명기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끝부분에 희망이 남았고 그 희망이 인간에게 유일하게 남아 인간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사실은 ‘희망’도 온갖 이 세상의 불행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후대에 오면서 밝은 쪽으로 이야기가 고쳐진 것입니다. 아테네인들이 ‘희망’이라는 속성을 경멸 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아닌 비밀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아테네의 법정 ‘아레이오스 파고스’에서 행한 연설은 유명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부활’이야기가 나오자 바울의 이야기를 비웃으며 등을 돌렸습니다. 그리스인들이 물론 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 신자들보다도 이미 신을 믿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다만 바울이 얘기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 특히 부활의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던 탓에 바울은 아테네인들에게 배척받았습니다(성경에도 나와있듯이 부활의 이야기가 나오기전까지는 아테네인들도 바울의 이야기를 매우 경청했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의 부활’의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피억압자들을 위한 그런 인물이 있었고, 이는 인간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에 포함되어 있는 과정으로 여겼습니다.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예수의 부활이라는 하나의 알레고리에 집약되었고 이것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희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를 부정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희망’은 ‘맹목적’인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그들에게 결코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희망은 우리가 그것을 통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온통 마음이 쏠리고 만다는 점에서, 그래서 정작 현실에 발 디딛지 못하게하고 함몰되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속성이었습니다.

희망의 속성을 보십쇼. 이성적이거나 논리적 이기는커녕, 현실과의 접점도 찾지 못한 채 단지 자기 자신이 소망하는 것을 저 멀리서 꿈꾸는 것입니다.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그렇다고 하늘을 나는 것도 아닌, 다만 부유하기만 할 뿐인 어설픈 속성. 이것이 진실입니다, 판도라 상자의 진짜 진실이자 인간의 서글픈 진실.

 

배트맨은 이번 마지막 시리즈에서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볼 것입니다.

그는 열린 상자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요.

 

 

ⅱ. 고담시의 판도라 상자

 

영화의 배경 고담시(Gotham City)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온갖 범죄의 소굴로 특히 악명이 높은 도시였습니다. 존경받던 부유한 집안 웨인가의 자식으로 태어난 브루스 웨인은, 자신의 부모님이 어이없게 죽임을 당하는 걸 보고 빛이 아닌 어둠의 영역에서 정의를 수호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이후로 그는 배트맨이 되고 그의 모든 삶은 배트맨을 위한, 그러니깐 브루스 웨인이라는 삶조차 배트맨을 위한 삶을 위해 바쳐집니다.

배트맨 시리즈 2편 ‘다크 나이트’에서 보셨겠지만, 초기의 배트맨과 하비 덴트의 적극적인 협력공세로 범죄는 눈에 뜨게 수그러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엔 정의의 수호자라는 상징이 된 하비 덴트가 사실 악의 소굴로 추락했고 배트맨은 정작 정의의 수호자 하비 덴트를 죽인 누명을 뒤집어쓴 채 배트맨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었던 상징의 사회적 자살과 더불어 반대로 고담시의 정의를 세우려했던 은밀한 뒷거래가 있었습니다.

시간은 조커와의 대대적인 전쟁이 있은 후의 8년으로 흘러갑니다.

하비 덴트와의 싸움 후 추락해 신체불구자가 된 브루스 웨인과 고담시에 일시적으로 찾아온 불안한 평화. 조커와의 전쟁을 끝으로 명망가의 브루스 웨인은 집에만 처박혀있는 폐인이 되었습니다. 거기엔 덴트와의 싸움 중 추락하여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실도 원인이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웨인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배트맨으로서 바치기로 했는데 그 전쟁을 끝으로 배트맨은 필요 없게 되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레이첼의 죽음은 그와 사회의 마지막 끈을 놓게 했습니다(또한 극 초중반에 알프레드가 레이첼이 결혼상대로 덴트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밝히기 전까지, 브루스는 자신과 결혼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로인한 상길감도 큰 몫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일련의 사건을 거쳐 다시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베인’이라는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적을 맞이하게 됩니다. 옛날의 힘을 되찾았다고 생각했고 준비가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배트맨은 베인을 찾아가 맞서지만 그는 끝내 패배하고 허리마저 부러지고 맙니다. 베인은 물리력으로만 따져보았을 때 배트맨 시리즈 중 가장 힘이 센 인물입니다. 라즈 알 굴, 조커 모두 물리력으로는 배트맨보다 아래였습니다(이 두 인물 모두 물리력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배트맨을 괴롭혔지만). 그러나 베인은 단순히 힘만 센 악당이 아닙니다. 배트맨의 심연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배트맨의 심연, 그가 배트맨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문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배트맨을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좀 더 크게 보자면 1편 ‘배트맨 비긴즈’에서 제기되었던 질문, ‘타락한 고담시는 과연 구원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일말의 구원의 여지도 남아있지 않으며 그러므로 파괴되어야만 할까?’라는 라즈 알 굴과 브루스 웨인의 대화 말입니다. 2편의 ‘다크 나이트’에서도 배트맨은 고담시는 구원되어야만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확신을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과 냉소감만 얻은 채 칩거생활로 숨어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고담시의 판도라 상자는 바로 ‘고담시의 구원가능 여부’입니다.

 

Ⅱ. 희망 없는 자들

ⅰ. ‘라이즈’가 다른 전편들과 다른 점

 

사실 이번 다크나이트 마지막 시리즈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엇갈리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전작에 비해서 임팩트가 약하다, 조커에 비해서 베인의 이미지가 너무 약하다, 2편 [다크 나이트]에 비해 드러나게 어설픈 부분이 많다 등등... 그러나 저는 라이즈가 다른 전작들에 비해 가지는 중요성을 말하고자 합니다. 다른 그 어떤 배트맨 시리즈의 전작들(배트맨 비긴즈, 다크 나이트)도 표현할 수 없었던 [라이즈]만의 그 특별한 이야기를. 그래서 왜 [라이즈]가 배트맨이라는 대서사시의 마지막 이야기로 그 어느 결말보다도 가장 합당했던가를.

우선은 사람들이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를 상당히 독특한 히어로물이라고 각인시켜준 ‘다크 나이트’를 살펴봅시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상당히 기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악당을 넘어서서 자신이 계속 내뱉었던 문자 그대로 ‘혼돈의 사자(使者) Angel of Choas'였습니다. 라즈 알 굴과 달리 그는 명확한 목표도 없었습니다. 굳이 들자면 ‘목표를 세우는 것 자체를 와해시키고 부정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다들 기억하실 테죠. 조커가 배트맨에게 한 대사, “You complete me."(넌 나를 완성시켜) 이 말은 조커에게 뿐만이 아니라 배트맨에게도 해당되는 말 이였습니다. 조커라는 명확한 악에 맞서 배트맨은 선(善)이라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세우게 되는 과정이 전작(前作)의 내용이었습니다. 조커에 의해 배트맨은 완성되었습니다. 사실 이번 [라이즈]에서 베인은 배트맨을 쓰러뜨린다는 강력한 적이긴 하지만 조커에 비해 다른 의미로 임팩트가 약하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또다른 의미로 베인이라는 악당이 배트맨에게 가지는 중요성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 점은 조커도 할 수 없었던 점입니다.

[라이즈]에서 배트맨은 베인과 맞서긴 하지만 그것은 조커와는 다른 형태로 전개됩니다. 2편에선 조커라는 절대악 미치광이에 맞서 배트맨은 고독한 영웅을 자처하며 절대악에 맞서는 절대선이라는 아이덴티티로 고담시에 떠오릅니다. 아니, 정정하겠습니다(2편의 [다크 나이트]만을 다루는 것도 장편의 글이 될 수 있지만 일단은 [라이즈]만을 다루기로 했기에 2편을 다루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게 되었군요). 조커는 ‘절대악’조차 아닙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또 다른 절대선을 자처하던 하비의 타락으로 인해, 그는 그가 쌓아왔고 지켜왔던 고담시의 정의를 죽은 하비 덴트에게 넘겨줌으로써, 죽은 하비 덴트는 고담시에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고 살아있던 정의, 배트맨은 고담시에서 영원히 죽어야만 될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배트맨은(비록 덴트에게 이름을 빌려준 셈이 되었지만) 얼핏 고담시의 정의를 세우는 것을 마무리 짓는 듯했고 누가 고담시의 정의를 담지하게 됐든(하비 덴트이든 배트맨이든) 어쨌든 명확한 악에 맞서 고담시엔 정의의 탑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반면 3편엔 배트맨을 물리적, 심리적으로 압도적으로 뛰어넘는 베인이라는 존재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베인이라는 절대악에 맞서 자신을 구축해가는 배트맨이 아닙니다. 이번 편에선 그 누구도, 심지어 베인도 배트맨의 진정한 적이 아닙니다. 진정한 적은 바로 배트맨 자신입니다. 이 마지막 시리즈는 오로지 배트맨 자신 홀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적에 맞서 정의를 세우는 듯했고 그 자신도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정작 그의 심연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에게 숨겨진 심연을 상대로 맞서 싸워야 되고 그 심연을 극복함으로서만 진정한 ‘배트맨’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당면한 문제는 그가 고담시에 홀로 세우려했던 정의가 무너지는 것을 목도한 후, 누가 그 정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가 입니다.

언뜻 보기에 전혀 엉뚱한 내용이 될 수도 있지만, 시몬 드 보부아르가 쓴 [제2의성]의 글을 잠시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녀의 태도는 마니교도(敎徒)의 그것이다. 마니교의 특징은 선과 악의 두 원리를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다. 선은 적극적인 활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악을 소멸하는 것으로써 목적이 달성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악마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별로 마니교적이 아니다. 신에게 몸을 바침으로써 악마와 가장 잘 싸우는 것이며, 악마를 정복하기 위하여 악마에게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월과 자유의 모든 이론은 악의 패배를 선에의 진보에 종속시킨다. 그러나 여자는 보다 좋은 세계를 건설하지 못한다. … 여자는 죄와 싸우고 사탄과 싸운다. 그러나 적극적인 목표로 향하는 대신에, 쉴 새 없이 적을 격퇴해야 한다는 것은 슬픈 운명이다.」

 

옳은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번 시도해보겠습니다(위의 인용문에서 ‘그녀’를 ‘(2탄의) 배트맨’으로 치환하면 되겠습니다). 2탄의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은 조커라는 명확한 악을 가지고 그 악과 맞섬으로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고담의 정의를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배트맨은 악을 제어하지만 악을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악 없이는 그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야합니다. 그 자신이,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정의가 하나의 주체로 (악의 존재여부와 상관없이)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라이즈’는 ‘다크 나이트’보다 스토리상으로 퇴보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라이즈’에서 그는 ‘악’을 초월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있습니다. 물론 이 태도를 견지한다 해도 이 세계에서 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2편과 3편이 다른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악을 두고 그것에 매달리느냐 그것을 초월하느냐 입니다. 그는 주변의 환경에 상관없이 자신을 성숙시키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합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라이즈]는 선과 악의 싸움도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2탄의 조커에 비해서 베인은 임팩트가 약하다고 했지만 그것은 위와 같은 이유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2탄은 과장되게 말하자면 ‘조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배트맨은 그에 맞서 자신을 성장시켰습니다. 그러나 3탄은 오로지 ‘배트맨 자신의 성장이야기’입니다. 따라서 다른 인물이 들어설 여지가 좁아 보였던 것입니다. 베인이 조커에 비해 그 의미도, 비중도 작았던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스스로 어떻게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가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물론 그 한 인간이라는 것은 배트맨뿐만이 아니라 고담 시민 전체로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확장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종교적 논의는 비록 여기서 논의의 대상이 아니지만 은연중에 혹은 드러나게 저는 이 글의 전반적인 논지에서 앞서 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나사렛 예수를 끌어들여 쓴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논의라기보다도 인간 나사렛 예수의 특징과 이 논지가 겹치는 부분을 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저는 신자가 아닙니다). 자세한 내용은 조금 더 뒤에 상론(詳論)될 것입니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배트맨의 정체성을 자신의 힘으로 세워나가는 서사시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이덴티티는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형성될 운명입니다.

 

말하자면 그의 문제는 ‘누가 고담시의 정의를 수호하는가’ 였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 이 문제는 배트맨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딜레마였습니다. 자신이 믿는 정의에 따라 고담시의 어두운 곳에서 열심히 정의사회구현(?)을 위해 힘쓰는 그. 그러나 그는 정작 자신이 헌신하려는 고담시의 정의가 정말로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시민들은 그 정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지 못했습니다, 아니 묻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면, 아니 무엇보다도 그들이 그 정의에 무관심하다면 배트맨으로서의 자신이 무너져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죠. 그는 어둠의 기사, 다크나이트를 자처하며 홀로 고담시의 정의를 외롭게 세우려는 영웅이였습니다. 그러나 라이즈에서 그는 고독한 영웅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그는 지금까지의 그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시험당하게 됩니다. 그는 이 문제를 일부러 건드리지 않은 채 있다가 배인과의 전쟁 중 고담시 전체를 상대로 일종의 시험을 하는 베인에 의해 배트맨은 어쩔 수 없이 ‘희망만이 마지막으로 남았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게 됩니다. 베인은 이것을 노렸고, 배트맨은 이것을 피하려 했습니다.

배트맨이 아니어도 다른 시민들에 의해 고담시에 평화가 찾아오리라는 희망.

베인은 희망의 부질없는 속성을 알았기 때문이죠,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각처럼.

베인은 배트맨의 약점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상대로 절망할 것입니다, ‘헛된’ 희망을 부여잡고.

 

ⅱ. 희망하는 자는 절망한다

 

베인과의 싸움 끝에 패배한 배트맨은 허리를 꺾이고 베인이 갇혔던 제3세계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브루스: 왜 그냥 날 죽이지 않았지?

베인: 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환영하잖아. 넌 죽음보다 큰 벌을 받아야 돼. 허나 네 육체가 아닌 정신을 말이지. 사람은 희망이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절망을 느껴.

 

감옥에서 눈을 뜬 배트맨에게 베인이 건넨 말.

말씀드렸다시피 베인은 브루스를 철저하게 꿰뚫어보고 있습니다.

베인과 배트맨의 첫대면의 싸움에서 베인은 배트맨에게 “너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려하지만 난 어둠에서 태어났지” 라는 말을 던집니다. 이것이 베인과 배트맨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절망 속에서 태어난 자(베인)와 절망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배트맨). 그렇기 때문에 배트맨은 온전히 절망에 몸을 맡기고 있는 베인과 달리, 필연적으로 희망이라는 영역에도 발을 반쯤 담그고 있습니다. 베인은 희망의 허위를 폭로해 그를 철저히 파괴하여 절망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빛.

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

하지만 기실 그 감옥을 나갔던 사람은 베인(사실은 틸리아)이 처음이자 마지막 이였습니다. 그에게 계속 들려오는 몰락하는 고담시의 소식, 계속되는 도전에도 결코 끝까지 오르지 못하는 절망의 감옥. 예상대로 베인은 배트맨의 약점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자유의 빛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아무 것도 하지 할 수 없는 철저하게 무능한 자신을 깨닫는 배트맨. 그는 절망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희망하는 자는 절망할 것입니다.

 

Ⅲ. 희망 없는 자들의 희망

ⅰ. 절망하는 자는 희망한다

 

「‘너희가 너희 별 위에서 전쟁을 위해 비축하기 전에

내가 천상의 별들에서 다툼과 승리를 너희에게 노래해주마.

너희가 이 별 위에서 육체를 움겨잡기 전에

내가 영원의 별들에서 쉬는 꿈을 꾸게 해주겠노라.’

 

이 ‘너희들이 육체를 움겨잡기 전에’라는 구절은 숭고한 아이러니처럼 보인다. 저 연인은 결코 육체를 움켜잡지 않는다. 그들이 전쟁을 위해 비축하는 일이 결코 없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오직 희망없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희망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exile or death VS exile by death’

베인 일당들에게 점령당한 고담시에서는 기존의 법과 규율이 아닌 시민들을 위한 새로운 법 아래에 자유로운 도시를 만들어주겠다고 하고선 ‘법이라는 이름의 무법’으로 고담시를 통치합니다. 무법의 법으로 마구대로 시민들을 재판하는 임시재판소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을 것이냐 death’, ‘얼음판 위를 걸어갈 것이냐 exile’에서 선택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를 선택합니다. 얼음판 위를 걸어가는 것은, 어쩌면 그 가능성이 희박하긴 하지만 살아나갈 수 있을 확률이 조금이라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배트맨에게 가해진 시련과 마찬가지로 베인 일당이 시민들을 처형하는 이러한 방식은 희망을 깡그리 뭉게기위한 시도입니다. 왜냐하면, 당장에 처형 받아 ‘죽음’으로 이르는 것보다는 그래도 얼음에 의한 추방이, ‘나는 혹시라도 이 얼음판 위를 건널 수 있는 행운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희망을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얼음판에 발을 올리는 순간 스스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뿐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마치 제3세계의 감옥에서 천장은 하늘을 향해 뚫려있지만 사실상 탈출할 수는 없는 불가능한 상황과 동등한 환경입니다. ‘추방이냐 죽음이냐’라는 선택은 얼핏 보기엔 자비를 베푸는 것 같지만 실은 어떤 선택이든 죽음으로 이르는 기만적인 선택지들입니다. 베인일당은 이러한 선택지 속에 어설픈 희망의 빛을 던져주어 고담시민들을 철저하게 내적으로 붕괴시키기 위해 이런 짓을 합니다. 이를테면 고든경찰청장이 자신을 차라리 죽이라고 하자 판사는 ‘추방에 의한 죽음’이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베인일당은 고든이 후자를 선택하여 고든도 헛된 희망을 부여잡고 그 길로 절망에 빠져들기를 바라지만 고든은 그런 속성을 잘 알고 차라리 당당한 죽음을 맞이하려했던 거지요. 물론 재판소는 이러한 것을 막기 위해 전에 와는 다른 판결인 ‘추방에 의한 죽음 exile by death'라는 다른 판결을 내립니다. 결국은 이들이 내린 추방이란 판결도 사실 죽음과 다름없었다는 그들의 본색을 이제야 드러내는 셈이지요. 어떤 판결이든 간에 고담시의 희망을 말소시키기 위한 판결들이라는 것은 명백할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지만 모두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 얼음판 위를 고든마저 걷게 됩니다. 고담시의 모든 사람들은 시험대위에 올라가게 되고 말하자면 얼음판위는 그것의 상징입니다.

 

그러면 브루스 웨인은 어떤 상황인지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 볼까요.

감옥을 탈출하려던 그의 계속되는 노력은 그러나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자꾸 실패하게 됩니다. 또다시 감옥의 탈출을 실패한 웨인은 노인에게서 이상한 소리를 듣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군. 그것이 자네를 강하게 하지는 않아.”

...“(탈출하고 싶다면) 밧줄 없이 올라가. 그러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자네에게 힘을 줄꺼야”

 

밧줄 없이 서서히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하는 브루스 웨인.

그가 자꾸 추락했던 그 지점 앞에서 다시 서게 됩니다. 그 지점을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떨어져서 죽을 것인가? 이제는 밧줄도 없습니다. 뛰어오르려는 순간 브루스의 등뒤로 쏟아져 나오는 박쥐. 그는 아마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로 인해 박쥐를 두려워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배트맨이 되었습니다. 다시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두려움의 상징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이제 홀로 온전히, 완전한 절망적인 조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그제서야 하늘을 향해, 저 빛을 향해 아무런 조건없이 자신의 온몸을 내던집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손은 탈리아 외에는 닿지 못했던 하늘로 향하는 계단을 잡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나서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이 상황에서야 브루스는 비로소 하늘에 닿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황이 아닌, 죽음을 진정으로 두려워하게 되는 상황에서야 브루스는 비로소 희망의 끈을 잡을 수 있게 되는데, 희망은 (그것이 죽음을 통한 균열이든 혹은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서든 간에) 우리의 ‘일상’ 혹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체계’라는 것에 일종의 균열이 생김으로써 그것도 ‘불쑥’ 찾아오게 됩니다. 이 소단락에서 제가 인용한 벤야민의 글에 나오는 저 연인들에게 순간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는 별처럼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은 오직 희망없는, 즉 균열 속에 갇혀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자들에게 찾아온다는 벤야민의 말은 유효합니다. 현실의 균열에 대한 몸부림, 하나의 떨림은 비로소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절망하는 자는 희망합니다. 희망은 결코 밝은 빛을 항상 우리에게 던져주지는 못하며 절망의 끝에서야 수줍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가늘게 떨릴 뿐입니다. 문제는 그것에 압도당하느냐 혹은 자신이 하나의 떨림이 되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얼음판 위를 걸어더던 고든 일행에게 고담시를 구원할 발화점이 떨어집니다.

 

ⅱ. 판도라 상자를 열어본 배트맨

 

고담시로 다시 돌아온 배트맨.

배트맨이라는 상징적인 존재가 다시 돌아왔다는 신호들로 인해 고담시의 시민들은 다시 결집됩니다. 이점에서 희망의 속성들을 색다른 점에서 살펴봅시다.

희망은 일종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그 기표아래 다양한 것들을 ‘결집’시킵니다. 그러나 또한 반대로 상징으로부터 다양한 것들이 ‘표출’됩니다. 말이 조금 이상하게 꼬였군요. 다시 풀어봅시다. 사람들은 하나의 기표아래 결집되지만 그 기표에 다양한 내용을 채워넣는 것도 그 기표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내용들입니다. 희망은 이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라는 것입니다. 배트맨이라는 상징 하에 결집한 고담시의 사람들은 각자의 의지와 꿈을 품고 자신들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맞섭니다.

극초반에 블레이크에게 웨인이 건네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길 바랬어, 누구나 배트맨이 될 수 있다는. 그래서 가면을 쓴거야.” 라는 말은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그 클라이맥스는 거리에서 고담시의 시민들과 베인 일당이 대치하는 시가전전투입니다. 이 시가전은 상당히 저에게 의미 있게 다가왔는데, 이전에 배트맨이 적들과 싸우는 방식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구도 모르게 고독하게 싸우거나(다크 나이트라는 별명답게), 자신의 최첨단 무기를 동원하여 적들을 분쇄합니다(본격적인 시가전이 있기 전에 배트맨이 자신의 ‘더 뱃’이라는 전투기를 이용하여 시민들을 잠깐 도와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배트맨은 맨몸으로 시가전에 참여하게 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이 부분을 넘어갈 수도 있었으나 저는 이러한 상징성을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배트맨이 굳이 자신의 무기를 이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싸우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배트맨은 수많은 고담시의 사람들 속에서, 무기를 이용하지 않고도 다만 시민들과 ‘함께’ 고담시를 수호하기 위해 적들과 맞서 싸웁니다. 그는 이제야 방황을 마칠 운명입니다.

하나의 상징(배트맨) 아래 결집한 시민들.

배트맨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습니다.

본래의 판도라의 상자의 의미처럼 무슨 행복이라던가 혹은 불행한 것들이라던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열린 상자 속에서 배트맨이 이제야 본 것은 '고담시의 시민‘들이었습니다.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하는 것도 결국엔 인간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희극도 비극도 오직 인간의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 시민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행동하는 시민들‘은 진정으로 판도라 상자의 내용물입니다. 역사 속에 살면서도 결코 그 역사 자체에 편입되지는 않는 우리 인간들은 역사를 써내려가면서도 그 역사가 어떻게 될지는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예측불가능한 우리 인간이야 말로 판도라 상자의 내용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잠시 잊고 있었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배트맨은 더 이상 혼자 싸우지 않습니다. 그는 시민들과 ’함께‘ 싸웁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갈구하던 문제의 해답을 얻게 됩니다.

인간은 ’희망적‘인 존재입니다. 인간과 희망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아래에 풀어서 서술해보겠습니다.

 

ⅲ. 전설이 끝난다(The Legend ends)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그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발터 벤야민

 

'이 세계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이 세계를 위한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웅장하면서도 간결한 표현은, 복음서가 그들의 '기쁜 소식'을 천명한 몇 마디 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아이(나사렛 예수)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인간사에 절대로 일어날 수도, 일어나서도 안되었던 일들이 일어난, 자신이 겪었던 세계대전의 20세기를 이해하려고 처절하게 노력했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무엇이 남는가? 언어가 남는다: 귄터 가우스와의 대담" 중의 끝부분을 발췌하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자신인 인간에 대해 모르는 점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를 포기해야 할 이유는 아닙니다. 명확한 저주 속에서, 불명확한 희망을 바라보며 한발자국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위대함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아렌트: 여전히 저는 모든 행위는… 그것은 하나의 모험이죠…우리가 어떤 시작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가닥을 관계망에 짜 넣습니다. 다만 우리는 거기서 등장하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지요. 우리 모두는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주께서는 사람을 용서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모든 행위에 대해 참입니다. … 사람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말하고 싶은 점은 이런 모험은 오로지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신뢰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근본적인- 란 모든 사람들 안에 있는 인간적인 것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모험도 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배트맨은 고담시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봅니다.

 

고대그리스인들의 생각처럼 희망은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설프기 그지없는 희망. 그러나 어설프다는 그 점이 우리에게 있어서 바로 희망이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희망은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 어설픈 희망에 우리들의 자유와 의지를 채워넣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려는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씌어졌고 그래서 항상 새로웠습니다.

파멸의 순간에 구원은 예기치 않게 다가옵니다. 이 글을 썼던 아렌트도 칠흑같던 그 어둠의 2차 세계대전을 뚫고 이 글을 썼습니다. 암흑 같던 시대에 인간의 근본 조건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듯한 시간들.

역사가 예측할 수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것은 그 곳에 인간의 자유와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인간의 자유와 의지의 상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 이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고대그리스인들은 옳았고, 그 이하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은 틀렸습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은 바로 이 부분에서 서로 갈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직까지 그저 하나의 신화가 아닌 ‘삶의 원리’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의 나사렛 예수의 행동원칙들입니다.

 

저 멀리, 아무 희망없이 고통받던 한 민족에게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신의 아들’로 불린 한 인물에 대해 코멘트하며 이 서사시의 끝을 내리고자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번 영화를 보면서 나사렛 예수와 배트맨의 공통점을 많이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이 인물과 배트맨의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신의 아들’ 이라는 점에서만 기억되어야 하고 그것만이 우리에게 그의 모든 아이덴티티가 되어선 안 됩니다. 그가 우리들에게 기억되어야 될 또 다른 부분은 그는 또한 ‘사람의 아들Son of Men'으로 불리었다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의 어떤 측면들은 기독교의 종교적 메시지와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이스라엘의 공적 권위에 도전하는 데 열중했던 그의 동료들과의 작고 친밀한 공동체의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라는 점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동료들’과 새 세상을 위해 분투했습니다. 배트맨은 고독한 영웅으로 끝나지 않고 고담시의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예수와 배트맨과의 공통점으로 생각하는 점입니다.

 

이제 배트맨은 사라졌습니다. 아니 배트맨이 사라졌기 때문에 비로소 배트맨은 어디에나 편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는 또 시작될 것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라는 것은 사실 별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 그곳이 시작점입니다.

 

'이제 새로운 소설이 시작된다. 한 인간이 점점 새로워지는 이야기, 재생의 이야기, 하나의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로 점점 옮겨가는 이야기, 새롭고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실재를 그에게 제시하는 소설이, 이것이 새로운 소설의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이야기는 끝난다.' (E.H.Carr)


김용원(물리교육09)  knuepres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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