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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회/소설 가작] 기억 상실

황규필(국어교육09)l승인2015.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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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상실

황규필

 

“빰빠빠빠~빰빠빠빠~”

울리는 휴대폰 알람소리에 H는 가늘게 눈을 떴다. 눈부신 햇살이 슬그머니 커튼 넘어 방안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귀청이 떨어지게 울리는 알람소리만 아니라면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H는 알람을 잠재우고 다시금 고요한 평화를 맛보기 위해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빰빠빠빠~빰빠빠빠~”

계속해서 울리는 알람소리에 H는 조금 짜증이 났다. 정지버튼은 쉽게 손에 닿지 않았고 H의 손은 한참을 휴대폰 위에서 헤매었다. 이윽고 알람소리가 멈추자 H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잠의 실타래를 잡아당길 채비를 하였다.

그러나 H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눈을 떴다. 그리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알람소리를 뿜어내는 낯선 휴대폰, 그것은 H의 것이 아니었다. H는 휴대폰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휴대폰이었다.

H는 자신의 휴대폰을 찾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낯선 여인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불 밖으로 새하얀 가슴을 드러낸 채 잠들어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의 이 여인은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 부끄러움이란 일말의 감정도 없이 나체로 잠들어있는 것인가. 간밤에 술을 마시고 유흥업소 아가씨라도 데리고 나왔단 말인가.

H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기억은 나지 않았다. H가 알고 있는 한, H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일에 돈을 써본 적이 없는 인간이었다. H는 혹시라도 기억이 날까 싶어 낯선 여인의 얼굴을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음마저 일지 않는 생전부지의 낯선 얼굴이었다.

문득 낯선 것이 여인의 얼굴뿐만이 아닌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서서히 고개를 들어 방을 둘러보았다. H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빛이 어렸다. 방은 낯선 휴대폰과 여인의 얼굴처럼 전혀 본적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생전부지의 여인의 방으로 들어왔단 말인가. 옷을 입지 않고서는 깊은 잠을 잘 수 없는 괴상한 버릇을 가진 여인의 옆에서, 나 또한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잠이 들었단 말인가.

H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허탈한 탄식을 낯선 허공에 내뱉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떠오르지 않는 어제의 기억.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H는 두 무릎을 세워 고개를 파묻고는 풀린 기억의 실타래를 잡기위해 애썼다. 그러다 더욱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기억이 없었다. 어제의 기억뿐만 아니라 그제의 기억, 일주일간의 기억, 일 년간의 기억을 포함한 모든 기억이, 심지어 H 자신의 이름, 나이마저 새 집을 향해 떠난 이삿짐 차량처럼 깨끗하게 사라졌다. H의 얼굴은 굳다 못해 창백해지고 있었다. 두려움이 이불 속에 파묻힌 다리 끝에서부터 밀려와 온 몸을 휘감았다.

나는 누구란 말인가. 왜 여기 누워있는가. 도대체 모아지지 않는 기억의 파편들은 어디로 숨은 것인가.

“일어났어?”

잠에서 깬 여인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잠긴 목의 탁성으로 말했다. 갑작스런 여인의 말에 H의 몸을 휘감았던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당혹스러움이 대신하여 차지하였다. H는 무어라 말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어났으니 일어났다고 대답해야할 것 같기는 했다. 그 다음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야 할까. 내가 왜 여기 있냐고 물어야 할까. 내가 누구냐고 물어야 할까. H의 머릿속은 온갖 질문들로 가득 찼다. 여인은 H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인지 아니면 다시 잠이 든 것인지 여전히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 여인의 얼굴을 쳐다보다 H는 슬며시 웃음이 흘렸다.

기억상실. 기억상실에 걸렸군.

H는 자신이 일시적인 기억상실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어젯밤 H는 이 여인과 함께 옷을 벗은 채로 침대로 향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불을 끄고 잠이 든다. 다음날 7시에 휴대폰이 울리는 알람소리에 기상하여 눈을 뜬다. 하지만 너무 깊은 잠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기억의 혼란이 온 것이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H는 이 여인에게 자신이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어쩌면 불필요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기억은 곧 돌아올 것이고 그때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최대한 의심을 사지 않고 과거의 H처럼 행동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판단을 내리자 H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다시금 고요한 아침의 평화를 누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H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최대한 과거의 H처럼 보이길 바라면서.

“응. 일어났어.”

“그럼 먼저 씻어.”

여전히 눈감은 여인의 대답은 한참 뒤에야 돌아왔다. 안 그래도 따뜻한 물로 샤워하며 머릿속의 혼란을 잠재우고 싶었던 H는 자신의 허리를 감은 여인의 손을 풀고 욕실로 들어갔다. H는 따뜻한 물을 틀었다. 샤워기를 통해 뿜어져 나온 물은 바닥에 닿자마자 금세 수증기로 변해 욕실을 뒤덮었다. 짙은 안개같이 뿌옇게 화장실을 뒤덮은 수증기는 거울에 다닥다닥 붙어 샤워하는 H의 모습을 흐려놓았다. 흐린 거울 속에서 움직이는 H의 실루엣은 답답해보였다. H는 흐린 거울이 자신의 기억상실 상태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H는 거울에 붙은 수증기를 지우고 싶지 않았다. 굳이 H가 거울의 수증기를 지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마친 후 욕실의 문을 열면 자연스레 흐린 거울은 깨끗해지리라 생각했다. 동시에 흐린 기억 역시 명료해지리라 믿었다.

그런 믿음으로 샤워를 끝내고 나온 H는 그 자리에 굳을 수밖에 없었다. 속옷을 입기는 했지만 여전히 당혹스러운 차림의 여인이 샤워를 마친 자신을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여인은 너무나도 익숙한 배역을 맡은 베테랑 연극배우처럼 자신의 귀에 대고 굿모닝을 속삭인 후 화장실로 들어갔다. H에게 오늘 아침이 좋은 아침은 아니었지만 과거의 H가 했으리라 추측되는 말을 해야만 했다. 비록 상대 배우가 이미 퇴장한 후이지만 연극의 한 장면을 완성시키기 위해 싫은 대사도 맡아야하는 조연 배우처럼 H 역시 굿모닝으로 작게 화답했다.

 

오늘 수업 잊지 않았지? 시험 잘 보고.

먼저 챙겨서 가. 나중에 연락할게.

 

식탁 위에는 빨간 하트 모양의 그림과 함께 작은 메모가 적혀있었다. H는 또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수업이라 하면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은 학생인가. 교사인가. 어디로 가야하는가. 초등학교인가. 중학교인가. 고등학교인가. 대학교인가. 연극을 그만 두고 여인에게 자신의 기억 상실을 고백할 것인가. 믿어 줄 것인가. 아니면 어설픈 농으로 치부할 것인가.

“삐리리릭~삐리리릭~”

어디선가 맹렬히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H의 혼란은 멈추었다. 두리번거리며 소리의 끝자락을 잡아채어 서서히 당겨보았다. 아침의 평화를 무참히 깨부쉈던 낯선 휴대폰이 끌려 들어왔다. 휴대폰에는 역시나 낯선 이름 세 글자가 떠있었다. H는 문득 휴대폰이 자신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심 끝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상대방을 먼저 확인하기 위해 침묵을 선택했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상대방의 다급한 목소리는 H의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야! 왜 이리 전화를 늦게 받아. 아직도 자고 있는 거야? 오늘 토익 시험 있는 거 잊었어? 여보세요, 듣고 있어? 뭐야, 이거 자고 있나?”

“저, 실례지만 누구신지......?”

H는 간신히 용기를 내 물었다. 동시에 전화기 건너로 실소가 터져 나오는 것을 들었다.

“또 늦잠 잘 것 같아서 깨웠더니 아침부터 그게 무슨 장난이야? 일어났구나. 그래. 있다 1시간 뒤에 OO고등학교 앞에서 봐. 또 늦지 말고.”

호탕한 목소리를 가진 상대방은 말을 마치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듯 바로 전화를 끊었다. H는 통화가 종료된 후 한동안 휴대폰 위로 깜빡이는 상대방의 이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H를 자연스럽게 대했고 만나자는 약속까지 했다. H는 일단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화기 너머에 상대방을 보면 기억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그때는 지금의 이 혼란이 우스운 일화로 남아 한 잔의 술 안주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H는 한결 마음이 편해져 입가에 미소마저 띄울 수 있었다. H는 옷을 챙겨 입었다.

 

찾아간 OO고등학교 앞은 수험생과 행인들로 가득했다. 한결같이 주머니에 두 손을 푹 꽂아 넣고, 겨울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늦가을의 아침 속으로 입김을 불어넣고 있었다. 정문 앞에는 토익 시험장임을 알리는 커다란 팻말이 학교를 지키는 정승마냥 세워져 있었다. H는 팻말 옆에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과 못 찾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함께 안고 서있었다.

“오늘은 웬일이야. 지각쟁이께서 빨리도 나오셨네.”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호탕한 목소리가 들렸다. 짧은 스포츠머리의 남자였다. H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스포츠머리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왁스로 머리의 이곳저곳을 세워 힘을 줬지만 검게 그을린 얼굴과 짧은 머리는 누가 봐도 갓 전역한 군인 티가 났다. 하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스포츠머리가 친구인지, 형제인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오늘 시험은 죽기 살기로 보는 거야, 알았지?”

“잠깐만. 내가 시험을 본다고?”

H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에 놀라 스포츠머리를 쳐다보았다. 기억을 되살리는 일에만 집중했지 시험을 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그럼 여기 시험 보러 왔지, 내 얼굴 보러 왔어?”

스포츠머리는 검게 그을린 얼굴을 H에게 들이밀며 웃었다. 그러나 H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왜 시험을 쳐야하는지 이유가 알고 싶었다.

“근데 내가 왜 토익 시험을 보는 거지?”

H는 붐비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열기를 속에서 스포츠머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스포츠머리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받았다.

“네가 요즘 새로운 여자 만난다더니 그 여자한테 기를 다 빼앗겨버렸나? 정신이 나갔어. 밤에는 딴 짓 하지 말고 잠 좀 자도록 해.”

스포츠머리는 자신의 야한 농이 만족스러운 듯 웃더니 말을 이었다.

“토익 시험을 왜 보긴 인마, 남들 다 보니까 보는 거지. 토익 점수가 있어야 취업도 하고 먹고 살 것 아니야.”

남들 다 보니까. 취업. 먹고 살기 위해.

H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뱉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H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토익 시험 30분 전.

 

H의 시선을 잡은 휴대폰은 토익 시험 30분 전임을 또박또박 알려왔다. 마치 병사들의 행동강령을 알리는 전령처럼.

“자, 그럼 빨리 들어가자고.”

H는 스포츠머리에게 떠밀려 시험장으로 향하는 수험생들의 긴 행렬에 동참했다. 수험생들의 긴 행렬은 마치 시커먼 개미떼를 연상시켰다. 여왕개미의 명령으로 먹이를 찾아 한 줄로 늘어선 개미떼. 그 속에서 H는 피곤함을 느꼈다. 아직 오전 9시 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치 퇴근 시간을 넘긴 직장인처럼 피곤했다. 지금 H에게는 북적거리는 군중보다 조용히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한적한 휴식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런 H를 스포츠머리는 기어코 교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H가 배치 받은 교실은 고요했다. 안락함 속 고요는 아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전쟁 직전 병사들의 모습에서 나오는 고요였다. 자리에 앉아있던 모든 수험생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 H를 바라보고 무언의 경고를 하였다. 이 고요를 무너뜨리는 돌발행동을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듯이. H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H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생각에 집중할 시간이 주어진 것에 만족해야 했다.

스포츠머리는 누구인가. 나와는 어떤 관계인가.

하지만 이내 문을 열고 들어온 시험 감독관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안내방송은 H의 집중을 훼방 놓았다. H의 눈에는 책상 위 칼로 파놓은 하나의 낙서가 들어왔다.

‘현재에 충실하자.’

삐뚤빼뚤하게 책상 위를 갉아먹은 낙서는 생각에 집중하는 자신의 모습을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장애물처럼 느끼게 하였다. H는 현재에 충실하기로 다짐했다.

기억은 분명 돌아올 것이고, 그 때는 분명 지금 시험장에서의 고민을 후회할 것이다. 그때 왜 그런 고민을 하였는가 하는 자책으로 긴 한숨을 쉴지도 모른다. 현재 중요한 일은 토익 시험이고, 스포츠머리가 말한 대로 취업도 하고 먹고 사는 데도 필요한 점수를 받아야만 한다.

이런 생각에 미친 H는 기억 상실에 관한 문제를 일단 뒤로 미뤄둔 채 모든 역량을 다해 시험에 집중해야했다.

 

시험을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스포츠머리는 시험을 망쳤다며 안 그래도 잡을 곳 없이 짧은 머리를 쥐어짰다. 덕분에 H는 30분이 넘도록 스포츠머리의 푸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H라고 시험을 잘 본 것은 아니었다. 기억을 되찾았을 때를 대비하여, H는 시험을 치러야만 했고, 그리하여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최선을 다했지만, 시험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듯 끝났다는 해방감보다 좌절감이 더 컸다. H보다 더 큰 좌절감에 쌓인 듯 한 스포츠머리는 자신의 짧은 머리를 스무 번도 넘게 쥐어짜고 있었다.

H는 언제까지 스포츠머리의 푸념을 들어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스포츠머리를 보내고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 생각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떠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기억을 되살려야만 했다. 설령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최소한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때 H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에 새겨진 발신자의 이름은 역시나 낯선 이름이었고, 머뭇거리는 H에게 드디어 머리에서 손을 뗀 스포츠머리가 어서 받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여보세요.”

“오빠. 어디야? 오고 있는 거야?”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임을 느낀 H의 눈이 가늘어졌다. H는 오늘 아침 속옷 차림으로 굿모닝 인사를 하던 낯선 여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는 H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마른 침만 삼켰다.

“오늘 보강 있는 거 잊은 건 아니지? 빨리 와. 난 지금 학교에 있으니까 학교로 오면 연락하고.”

H의 대답을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듯 전화기 너머 여인이 빠르게 말했다.

“학교? 무슨 학교?”

H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하며 어떤 학교를 말하는지 물어보았다. 저쪽에서는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지더니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우리가 다니는 우리 학교.”

H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금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H는 자신의 기억 상실이 분명 일시적인 것이라 믿고 있었다. 길게는 하루, 짧게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머리가 띵 하고 울리며 직소퍼즐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이루듯 모든 기억이 모여 H의 삶을 정상적으로 되돌리리라 믿고 있었다. H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H는 기다릴 테니 빨리 오라는 여인의 독촉과 함께 들려오는 통화 종료음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학교로 오래?”

옆에서 지켜보던 스포츠머리가 휴대폰 액정에 비치는 자신의 머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응.”

“잘됐네. 나도 어차피 학교 들려야하니까 같이 택시타고 가자고.”

말을 마친 스포츠머리는 분탕질된 자신의 머리를 가다듬으며 H를 큰길로 이끌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맹렬한 속도로 다가온 택시는 H와 스포츠머리를 태우고 출발했다.

 

도착한 곳은 ○○대학교였다. 캠퍼스 전체가 마치 노을이 진 듯 불그스름한 나무들로 가득 했다. 나무들은 노니는 바람의 한 자락을 잡기 위해 이리 저리 가지를 흔들거렸다. 그 사이사이를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몇몇 사람들은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H는 혼자만 외딴 곳에 떨어져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봐. 그리고 오늘 술자리 꼭 늦으면 안 돼. 그 선배 참을성 없는 거 알지?”

택시 안에서도 계속해서 머리만 매만지던 스포츠머리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H를 향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H는 스포츠머리에게 물었다.

“술자리?”

“그래. 오늘 그 선배가 한 턱 쏜다고 했잖아.”

H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부터 낯설었던 휴대폰, 옆에 누워있던 생전부지의 여인, 취업을 위해 치러야 했던 토익시험, 친구인지 형제인지조차 모르는 스포츠머리, 약속했다는 술자리까지. 기억은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은 채 행방이 묘연한 범인처럼 사라졌다. 지금까지 H는 기억이 되돌아 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조금씩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다.

만약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잠깐만.”

H의 두려움은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는 스포츠머리의 팔을 붙잡았다. H는 자신의 기억상실을 고백하고 싶었다.

“사실은 할 말이 있어.”

“오래 걸려? 내가 지금 누굴 좀 만나야 해서. 왜 있잖아. 요즘 만난다고 한 여자애.”

스포츠머리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무미건조한 표정이 자신의 기억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H는 당장이라도 별일 아니라며 스포츠머리를 돌려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H는 스포츠머리를 돌려보낼 수 없었다.

“사실.”

“그래, 사실.”

“지금.”

“그래, 지금.”

“중요한 이야기니까 진지하게 들어줘.”

“그래, 진지하게 듣고 있어.”

대답과는 다르게 스포츠머리의 왼쪽 팔목에 묶인 시계가 자꾸만 스포츠머리의 눈에 가 닿고 있음을 H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H는 자신의 다음 말을 들으면 스포츠머리도 어쩔 수 없이 집중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기억을 잃었어.”

H는 한 글자 한 글자를 최대한 또박또박 발음하여 스포츠머리에게 말했다. H가 아침부터 겪었던 모든 혼란과 혼동이 스포츠머리의 가슴 속으로 깊이 박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스포츠머리는 왼쪽 팔목에서 찰랑거리던 은빛 시계에서 눈을 떼었다. 커진 동공이 스포츠머리의 놀란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가.”

스포츠머리가 찬찬히 입을 열었다. 그와 함께 H의 마음 속 긴장의 끈이 팽팽해졌다.

“어제 술을 많이 마시긴 했구나.”

H의 마음 속 긴장의 끈이 딱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그런 말이 아니라고 다시 한 번 설명하려는 H의 입을 스포츠머리의 왼쪽 팔목에서 찰랑거리던 은빛 시계가 가로막았다.

“야, 인마. 그 술타령은 있다 저녁에 이야기하고, 지금 나 시간 없으니까 일단 좀 갈게.”

스포츠머리는 오늘 꼭 늦지 말라는 당부를 끝으로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H는 스포츠머리를 다시 불러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만 두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상황으로는 스포츠머리가 H에게 제대로 된 답변을 해줄리 만무했다. 허탈한 H의 귀로 휴대폰의 알람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수업 30분 전.

 

H는 여인이 기다린다고 말한 장소로 갔다. 갈색으로 빛나는 단발머리, 짙은 화장과 빨간 립스틱으로 한껏 치장한 여인은 오늘 아침 부끄러운 줄 모르고 가슴을 드러낸 채 자고 있던 낯선 여인이었다. 도착한 H에게 여인은 두 팔을 벌려 포옹의 뜻을 비치며 다가왔다. 낯선 여인의 두 팔이 가까이 다가와 안전거리를 침범한 순간 H는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느꼈다. H의 경계심은 순간적인 멈칫거림을 만들었지만 이와는 상관없이 여인은 품에 와 안겼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안 오는 줄 알았잖아.”

여인은 H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H는 여인의 목소리가 귀에 닿을 때마다 아침에 그랬듯 연극배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H는 고민했다.

이 명품 여배우 앞에서 그녀의 애인 역할을 소화해내야 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그녀와 손을 맞잡고,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하고, 오늘 아침과 마찬가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뒤섞여 잠을 자야하는 것일까.

H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나는 그녀를 모른다. 그녀의 이름, 나이, 성격, 심지어 나와의 사이에서 있었다고 생각되는 수많은 기억들까지 모두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단지 그녀가 나를 다정다감하게 부르며 팔짱을 낀다는 이유 하나로 그녀의 애인 행세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H는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여인의 두 팔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사실은.”

H가 자신의 기억 상실을 고백하고 싶었다. 이제 가짜 H의 역할에서 벗어나 가면을 벗고 무대 뒤로 퇴장하여 배우들과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런 H의 마음을 모르는 여인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말했다.

“됐어. 앞으로는 변명 대신 빨리 오길 바랄게. 가자. 수업 시작 했겠어.”

 

강의실에서는 교수가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출석을 확인하고 있었다. 여인과 H는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앉아있던 학생 몇몇이 H를 보고 눈인사를 보냈다. H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그들에게 마땅한 인사를 할 수 없었다. 이윽고 교수의 입에서 H의 이름이 불렸다. 하지만 H는 대답할 수 없었다. H의 이름이 강의실 공중에서 부유하는 먼지처럼 떠다녔다. 여러 번 H의 이름이 불린 후에야, 여인이 H의 손등을 가볍게 때린 후에야, H에게 쏟아진 여러 학생들의 시선을 느낀 후에야 H는 강의실 공중에서 주인을 찾아 헤매던 이름이 자신의 이름임을 알고 대답할 수 있었다.

곧 강의가 시작되었다. 교수는 발표조를 호명했고, 조원들은 강의실의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나눠준 유인물은 ‘이상’에 관한 작가론과 그의 작품 ‘거울’에 관한 작품론으로 구성되어있었다. 모든 학생들이 유인물을 받은 것을 확인한 발표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발표를 시작했다. H는 발표자를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을 받았다. 토익 시험장에서 H에게 무언의 경고를 보내던 수험자 중 한 명이었다. 발표는 ‘이상’의 생애로부터 시작하여 ‘거울’에 대한 설명으로 진행됐다. 발표지를 읽던 H는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옆에 앉은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받은 발표지를 책 밑으로 숨긴 채, 영어책을 꺼내 보고 있었다. 여인뿐이 아니었다. H가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영어책을 꺼내 읽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발표를 듣고 있는 학생은 강의실 앞쪽 줄에 앉은 학생들뿐이었고 그 외는 영어책을 보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엎드려 잠을 자고 있거나, 혹은 자기들끼리 알 수 없는 농담을 하며 낄낄대고 있었다. H는 이러한 강의실의 모습이 무척이나 이상하였다.

“지금 이 수업이 무슨 수업이지?”

여인은 시선을 영어책에 고정한 채 H에게 답했다.

“현대시론.”

현대시론이라.

H는 혼잣말을 내뱉고는 생각했다.

현대시론이라 하면 국어 관련 과목일 텐데, 어째서 학생들이 다들 영어책을 들고 공부하는 것일까. 영문학과에 다니는 학생들이 문학에 관한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국어 관련 수업을 듣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속하는 학생인가. 나도 옆에 있는 여인과 마찬가지로 ‘이상’의 생애와 ‘거울’에 대한 설명을 귓등으로 넘기는 영문학과 학생인가. 아니면 앞줄에 앉은 학생들처럼 발표에 집중해야하는 국문학과 학생인가.

H는 몰려오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여인에게 물었다.

“내가 국문과에 다니고 있나?”

“당연하지.”

여전히 시선을 영어책에 파묻은 여인의 대답이 짧게 들려왔다.

“넌?”

“나도 오빠랑 같이 다니잖아.”

“근데 왜 영어공부를 하고 있지?”

그제야 여인은 영어책에 고정한 시선을 H에게로 돌리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그래 자꾸. 토익시험 한번 보고 오더니 회의론자가 된 거야? 왜 영어공부를 하다니.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오빠도 뒤처지기 싫으면 어서 책 꺼내서 공부해. 참, 그러고 보니 중요한 걸 못 물어봤네. 토익시험은 잘 봤어?”

잘 볼 수가 없었지. 도통 내가 왜 그 시험을 봐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 스포츠머리도 내가 그 시험을 봐야한다고만 말하고 왜 봐야하는지는 납득할 수 있게 알려주지 않더군. 마치 지금에 너처럼 말이야.

H는 속으로 여인에게 말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낼 수가 없었다. H의 표정을 살피던 여인이 말을 이었다.

“잘 못 봤구나.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기에 내가 시간관리 잘해서 공부하라고 했잖아. 추천해준 스마트폰 어플은 사용하고 있어?”

“어플?”

“그래, 오빠 시간 관리 철저히 하라고 추천해준 스케줄러 말이야.”

H는 하루 종일 자신의 행동을 지령하던 휴대폰 알람을 떠올렸다.

“멍청하게 앉아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열심히 하자, 열심히. 어차피 이런 거는 시험 때 반짝 공부해서 학점이나 잘 따면 되는 거고.”

여인은 ‘이런 거’에서 유인물을 들어올려 H의 눈앞에서 펄럭이며 말을 이었다.

“하필 토요일에 보강을 하셔서 좀 그렇지만. 어차피 잘 된 걸. 오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우린 아마 학점 따는 데는 더 유리해졌으니까. 근데 생각보다 많이 왔네. 독한 것들.”

여인은 앞에 앉은 학생들 숫자를 헤아리더니 입을 삐죽거렸다. H는 순간 여인의 삐죽거리는 입술이 추악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짙게 화장한 여인의 빨간 입술이 사람의 피를 발라놓은 것처럼 보였다.

비좁은 강의실은 숨이 막혔다. ‘이상’에 대해 발표하며 오전에 봤던 토익 시험 점수에 대해 생각하는 발표자, 경쟁자의 숫자를 헤아리며 입을 삐죽거리는 빨간 립스틱의 여인,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앉아 시간을 보내며 조는 교수. 이들을 향해 늦가을 오후의 나른한 햇살 사이로 부유하는 먼지가 전진하고 있었다.

 

6시. 석촌역 6번 출구. 늦지 말 것.

 

수업이 끝난 H는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알리는 장소로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도는 수많은 사람들이 만드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각종 휴대폰의 벨소리, 사람들의 통화소리, 옆 사람과 이야기 소리, 엄마 등에 업힌 아기의 울음소리, 장사꾼들의 호객 소리들에 의해 지하도가 터질듯했다.

H는 이번 술자리를 통해 자신의 기억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선배의 얼굴을 보고 기억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은 H에게 그것이 불가능한 바람임을 말해주었다. 대신 H는 선배에게 자신의 기억상실을 고백하고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다 말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신림역 6번 출구를 찾아 올라오자 이미 도착해있던 스포츠머리를 만날 수 있었다. 스포츠머리 옆에는 정장 차림으로 말끔하게 차려입은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H는 직감적으로 그가 선배라고 불리는 이임을 알았다. 선배는 무엇이 그리 반가운지 H에게 악수를 청해 손을 잡고 연신 흔들어댔다. H 역시 입에 선배만큼의 미소를 띠고 선배가 흔드는 만큼의 악수를 했다.

H와 스포츠머리와 선배는 고기 집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금세 고기와 함께 먹을 수 있는 각종 야채와 소스로 가득 찼다. 소주가 도착하고 웃으며 서로 잔을 권했다. 고기가 익는 동안 스포츠머리는 선배의 취업 성공 수기를 청했고, 선배는 ‘부끄럽게 뭘 그런 걸’로 시작하여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공부 방법과 경험을 이야기하였다. 스포츠머리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선배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그러한 감탄사는 선배의 취업 수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H는 선배의 취업 수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야기의 지루함을 나타내는 H의 하품은 종종 스포츠머리의 감탄사와 겹쳐 나오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스포츠머리는 H의 발을 선배 몰래 찼다. 고기가 익고 술이 몇 잔 돌자 선배의 취업 성공 수기는 전형적인 고전영웅소설의 구조를 띄며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선배의 대기업 합격으로 결말이 난 영웅소설은 스포츠머리를 감동하게 하였고, 선배는 더욱더 뿌듯한 얼굴로, 마치 자신이 두 명의 목숨을 살려준 은혜로운 구세주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경쾌하게 소주잔을 들어 권주사를 외치고 있었다. H는 자신의 꿈이 취업에 성공하여 후배들이 청하는 성공 수기를 겸손한 척 이야기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알 수 없었다.

선배의 취업 수기는 몇 잔의 술과 함께 어느 새 여자 이야기로, TV에서 중계 중인 야구 이야기로 넘어갔다. 스포츠머리와 선배는 여자 이야기에서는 연신 낄낄대며 쏟아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야구 이야기에서는 서로 응원하는 팀에 배팅을 걸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응원하는 팀이 안타라도 치면 현장에서 응원하는 응원 단장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하는 것이었다. H는 기억이 없어지기 전 자신이 저 둘처럼 돈벌이에 대해 고민하다가 지나가는 여자 이야기를 하고, TV에 중계되는 야구를 보며 흥분했었나 생각했다. 그것 또한 알 수 없었다.

취기가 오르자 선배는 최근에 너희를 고민스럽게 한 문제가 있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스포츠머리는 복학 후 잘 해보려고 애썼던 여자후배와의 연애사업이 잘 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둘이 그 문제로 연신 술을 마시며 애쓰는 동안 H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문제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여자에 관한 문제는 아니었다. 취업에 관한 문제도 아니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문제는 오직 하나, 기억 상실이었다. 드디어 H는 자신의 기억상실을 고백해야할 시간이라고 느꼈다. H는 아직도 스포츠머리의 연애사업을 도와주고자 진지하게 조언을 해주는 선배의 말을 끊었다.

“요즘 제 문제는요.”

선배와 스포츠머리는 H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여전히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H는 술을 한 잔 들이켠 후 소리쳤다.

“제 고민은요!”

갑작스러운 외침에 스포츠머리와 선배의 이야기가 끊겼다. 스포츠머리는 놀란 눈으로 H를 쳐다보았다. 동시에 지겨워진 화제를 벗어날 기회를 잡았다는 듯 선배는 웃으며 물었다.

“그래, 네 문제는 뭐냐?”

아직 자신의 연애사업에 대해 할 이야기가 남아있던 스포츠머리는 아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기억을 잃어버렸다?”

“네.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에요. 불과 어제 일은 물론이고, 제 이름을 포함한 모든 기억들이 다 사라졌어요. 못 믿으시겠지만 정말입니다. 사실 지금 앞에 있는 두 분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H는 술을 토해내듯 단숨에 말을 내뱉었다. 선배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H의 고민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스포츠머리를 쳐다보았다. 스포츠머리는 선배에게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며 H의 옆구리를 쳤다.

“이놈이 술을 또 많이 처먹었네요. 오늘 점심에도 어제 술 처먹고 기억이 안 난다고 징징대더니. 정신 차려.”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H는 식탁을 두 손으로 치며 소리쳤다. 식탁을 치는 소리에 다른 손님들이 놀라 쳐다보았다. 스포츠머리는 주위 손님들에게 죄송하다는 인사를 돌리며 사과했다. 잠시 동안의 침묵 후 선배가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그랬지?”

“오늘 아침부터요.”

“기억을 잃었군. 나도 그런 적이 있지. 몇 년 전이긴 하지만.”

선배의 말에 H는 눈이 번쩍 뜨였다.

“기억이 사라진 거야. 바로 어제의 일도. 과거의 내가 했던 일이 모두.”

“제가 지금 그래요!”

H는 선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입가에 찬찬히 미소를 띠며 선배는 말을 이었다.

“사실 기억이 사라졌다기보다는 기억을 없앴다는 편이 더 맞는 말이지. 난 다시 태어나고 싶었거든. 그리고 실제로 기억을 없애고 다시 태어났어. 전혀 다른 나로 말이야. 그때서야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었지. 기억이 없다는 건 축복받은 일이야. 고민할 거리가 없거든. 앞으로 나아갈 일만 남은거지. 그리고 남들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잖아. 얼마나 편한 삶이야. 잘됐어, 이참에 공부 제대로 한번 해보라고. 백지 상태일 테니 영어도 외우는 대로 쏙쏙 들어갈 거고, 학점도 팍팍 올리고 말이야. 너도 그럼 일, 이년 후에는 돈벌이 제대로 하고 있을 거야. 자자, 기억을 잃은 H를 위해 건배하자고.”

H는 선배의 말에 적잖이 실망하며 선배의 손을 놓았다. 선배는 H를 아예 술 취한 자 취급하고 있었다. 스포츠머리는 H의 술주정을 받아친 선배의 말에 연신 감탄을 내뱉고 있었다. H는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 가자 술을 과하게 마셨는지 욕지기를 느꼈다. H는 급히 변기 뚜껑을 열고 나오는 토를 그대로 쏟아냈다. H는 상체를 일으켜 입을 닦아내며 거울을 보았다. 어느 취객의 주먹질로 인해 조각난 거울은 H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H는 밖으로 나갔다. 거리는 토요일의 네온사인과 적색 가로등이 뿜어내는 불빛들로 어지러웠다. 오늘 아침 H는 낯선 휴대폰이 울려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기억을 잃었음을 알았다. 옆에는 낯선 여인이 누워있었고, 그녀를 알지 못함에도 아무런 문제없이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였다. 스포츠머리와 만나 토익 시험을 보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학교에 와 낯선 여인과 함께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선배를 만나 고기와 함께 술을 마시며 취업과 여자와 야구에 대해 떠들었다. H는 쓴웃음이 나왔다. 기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어쩌면 그 누구하나 눈치 채지 못한 명품연기를 한 것이다. 비틀거리며 쓴웃음을 짓는 H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메시지였다.

 

집에 들어간 거야? 인사는 하고 들어가지. 내일 아침에 야구 동아리 모임 잊지 말고. 잘 들어가.

 

스포츠 머리였다. 그 밑으로는 술을 마시느라 알지 못했던 문자 메시지가 더 있었다.

 

10시 전까지는 들어와. 너무 많이 마시면 안 돼. 내일 영화 보기로 한 날이잖아. 들어오기 전에 연락하고. 사랑해.

 

낯선 여인이었다.

 

현대시론. 내일 오후 2시 보강. 강의실은 오늘과 같음. -조교

 

오늘 보강을 했던 그 수업의 문자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집 도착 30분 전

 

계속해서 H에게 행동강령을 내리는 스케줄러였다. H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H는 휴대폰의 스케줄러를 눌렀다. 앞으로의 스케줄러에는 H의 기억에 없는 온갖 스케줄로 가득했다. H는 스케줄 하나하나를 읽어나갔다.

오후 10시 집 도착. 오후 12시 취침. 오전 7시 기상. 오전 9시 야구 동아리 활동. 오전 12시 점심. 오후 5시 저녁. 오후 7시 영화. 오후 10시 집 도착. 오후 12시 취침.

이대로라면 H는 10시에 집에 도착한다. 도착하여 빨간 립스틱을 지운 여인을 안고 아무런 감정 없이 사랑을 속삭인다. 어쩌면 옷을 벗은 채로 침대로 향할지도 모른다. 12시면 모든 불을 끄고 잠이 든다. 다음날 7시에는 낯선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기상하여 샤워를 한다. 9시에는 스포츠머리와 함께 야구 동아리에 참여한다. 12시에는 취업과 여자와 야구 이야기를 하며 동아리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2시에는 낯선 여인과 함께 현대시론을 듣는다. 강의가 끝나면 저녁을 먹고 7시에는 영화를 본다. 10시에 집에 도착한 H와 여인은 아무런 감정 없이 사랑을 속삭인다. 어쩌면 옷을 벗은 채로 침대로 향할지도 모른다. 12시면 모든 불을 끄고 잠이 든다. 다음날 7시에는 낯선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기상하고......

H는 눈을 부릅떴다.

아니다. 이것은 아니다.

H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휴대폰은 쉴 새 없이 벨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H에게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듯 했다. H는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석촌 호수가 흐릿하게 보였다. H는 그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넘어졌으나 아픈 줄도 몰랐다. 오히려 정신은 점점 맑아지고 명료해졌다. 도착한 H는 격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고른 H는 호수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잔잔한 호수는 무엇이든 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H는 여전히 벨소리를 내며 울리는 휴대폰을 있는 호수 한 가운데로 힘껏 내던졌다. 휴대폰은 어둠 속에서 마지막 벨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곧 이어 퐁당 소리와 함께 몇 줄의 동그란 물결이 잔잔히 퍼지는 것을 H는 보았다. H는 거미줄에서 겨우 탈출한 곤충처럼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 해방감을 표현하기 위해 H는 두 손을 번쩍 들고 소리를 질렀다. 드넓은 호수는 H가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소리도 삼켰다. 힘이 빠진 H는 그러나, 표정은 웃고 있는 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H는 거울이 보고 싶었다. 가득한 수증기로 인해 흐려진 거울이 아닌, 취객의 난동으로 인해 깨진 거울이 아닌, H의 모습을 온전히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 보고 싶었다. 거울 속에 H를 보고 인사를 하고 싶었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 싶었다. H는 일어났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거울을 보기 위해서. H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았다.

달리는 H의 위로 적색 가로등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 하나가 반짝였다.


황규필(국어교육09)  knuepres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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