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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호/사무사] '작은 선녀'께 드리는 편지

편집장l승인2020.09.14l수정2020.09.25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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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선녀’께 드리는 편지

가을 바람이 선선하게 몸을 감싸는 9월입니다. 지난 3일, 당신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벌써 9년이 되었습니다. 가장 힘 없고, 가장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하루하루 생존하는 이들 곁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따뜻한 사람이었던 당신을, 우리는 아직도 ‘노동자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꽃처럼 피어날 소녀 시절, 당신은 근로정신대 방직공장에 끌려갔습니다. 공장 안은 기계의 열기와 먼지로 가득했고, 폐렴에 걸려 피를 토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콩깻묵이나 옥수수에 밀가루를 섞은 주먹밥을 먹으며 하루 14시간씩 당신은 삶을 지탱했습니다. 손이 서투른 당신을 도와주곤 했던 옆자리 언니가 있었습니다. 웃음이 예쁜 언니는 실을 감는 기계에 빨려들어가 몸이 물레에 감겼습니다. 핏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튀었고, 물레는 계속 돌아갔습니다. 
공장에서 도망친 당신은 어느덧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구걸을 하고, 허드렛일을 하고, 시장 바닥에서 배추잎을 주워 팔았습니다. 상경하여 판잣집을 전전하다 쌍문동 공동묘지 근처무허가 판잣집에 정착했습니다. 첫째 아들은 평화시장 미싱사로 일했는데, 어두운 생활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청년이었습니다. “열서너 살 애들이 시다로 새벽밥을 먹고 나와 한밤중까지 일한” 얘기, “어린 여공들이 졸린 눈을 비벼 가며 일하다 다리미에 화상을 입은” 얘기들을 조곤조곤 들려주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느라 참 분주했습니다. 그리고 시린 추위가 다가온 11월, 평화시장 거리로 나선 아들은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마지막 순간 당신은 아들에게 약속했습니다. 그 달 27일, 당신은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결성합니다.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민주화’를 외치며 수많은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평화시장 사업주와 정부로부터 탄압받는 노동자들에게 점심을 챙겨주고, 여공들에게 노동 교실을 열어주며, 독재정권 아래에서 180번의 구류처분과 3번의 옥살이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 당신은 사랑하는 아들 곁으로 떠났습니다. 한진중공업 김진숙 씨의 고공농성을 지지하기 위해 희망버스에 오르려던 모습이 당신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났습니다. 며칠 전 재래시장에 갔는데, 예상했던 시장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분주히 지나다니고, 목소리를 높여 채소를 사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생존’의 터였던, 떠난 아들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던 시장이라는 공간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며, 나는 문득 당신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과연 당신이 외친 인간다운 노동을 영위하며 살고 있는가. 당신 앞에서 이들의 노동 현실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가. 낯짝 뜨거운 의문이 들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 불안정한 고용 상태, 부당한 임금과 대우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 기저 한 켠에는 고용허가제가 있습니다. 이 제도는 내국인 근로자가 일하지 않아 인력난을 겪는 업종에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도록 허가하는 제도입니다. 맹점은, 노동자가 사업주 동의 없이는 이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임금체불, 폭행, 성폭력, 차별 등을 당할 경우 이직을 허용하지만, 그 역시 노동자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8시간 이상의 노동은 물론 “그만 두면 밀린 월급을 주지 않겠다”라는 협박을 듣고, 최저임금과 초과수당은 보장되지 않은 채, 각종 폭행, 폭언, 성희롱, 차별을 당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소리 없이, 목숨을 끊습니다. 50년 전 평화시장의 모습이 고스란히 겹쳐집니다.
가을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릅니다. 당신께 보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 아직도 세상 곳곳에, 비참하게 존재합니다. 더 이상의 노동자들이 당신 곁으로 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을 느끼며, 이 땅에서 환하게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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