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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호/독자의 시선] 시칠리아, 맑았던 날들

최수아 경기 광주중학교 교사(불어교육 13) 한국교원대신문l승인202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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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밖을 언뜻 내다보니 날이 무척 맑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 위치한 카타니아 공항에 발을 디뎠다. 버거워 보이는 크기의 배낭을 짊어진 채 출구로 나가니 환한 인상의 스테파니아가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든 채 손을 흔들고 있다. 까만 곱슬머리에 반짝이는 눈빛, 선한 웃음을 지닌 그녀는 마치 진작부터 알았던 사람을 맞이하는 듯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Garden & Love’라는 비영리단체를 운영하는 스테파니아와 아만 부부는 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여름 캠프를 기획했고, 이탈리아와는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두 명의 외국인 청년들을 스텝으로 초청하고자 했다. 나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온 쾌활한 하이디가 스텝으로 초청되었다. 만 12세에서 14세 사이의 이탈리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캠프는 총 9일 동안 미스터비앙코(Misterbianco)에 위치한 스테파니아의 집에서 진행됐고, 주로 몸을 활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었다. 스테파니아는 내게 캠프 중 하루는 ‘코리안 데이’, 즉 한국 문화의 날로 정해, 한국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한국 놀이 및 춤을 배우는 프로그램을 구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영국인 스텝 하이디와 인도인인 아만 역시 각각 영국과 인도 문화의 날을 정해 진행할 계획이었다. 스테파니아는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는 내게 따뜻한 말을 건네주었다. “아이들은 지금껏 한국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 네가 만날 시칠리아 사람들은 한국인을 처음 만나는 뜻깊은 경험을 하는 거야.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캠프가 시작됐다. 스테파니아의 집에는 푸른 잔디가 펼쳐진 널따란 정원이 있었고, 우리는 모두 잔디밭 위에 오밀조밀 모여 앉았다. 종이에 큰 꽃을 그린 뒤 꽃잎에 자신의 장점을 적고, 그 단어들을 넣어 시나 가사를 적는 활동으로 캠프의 포문을 열었다. 나 역시 아이들처럼 종이에 큰 꽃을 그리고 꽃잎마다 나의 장점을 적어 넣었다. ‘프랑스어를 할 수 있음, 태권도를 할 수 있음, 즐거운 성격, … , 사랑이 넘치는 마음!’ 특히 내가 사랑이 넘친다는 것을 강조하며 장점들을 이용해 랩을 만들었더니 모두 박자를 맞춰주며 즐거워했다. 하이디와 나에게는 아침 시간에 아이들을 깨워 기상 운동을 진행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는데, 마침 요가 지식이 있던 하이디는 요가를, 나는 태권도 동작과 몸풀기 운동을 준비했다. 기상 운동은 기본 품새 동작이나 주먹 지르기, 발차기 위주로 진행했는데 나중에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님들도 배우고 싶어 하셔 두 번 정도 큰 강습을 했다. 다들 이국적인 운동에 흥미를 느낀 모양이다.  
캠프는 다양한 종류의 활동으로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젓가락으로 김밥을 먹고 나의 진두지휘 아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했다. 동작이 간단한 K-POP 댄스도 배웠다. 하이디는 크럼블 파이를 만들고 중세 시대 기사들의 칼싸움을 응용해 만든 춤을 준비했으며, 아만은 인도 전통 의상을 입고 발리우드 음악에 맞춰 땀이 흥건해지도록 춤을 추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나와 하이디, 아만이 준비한 문화 활동 외에도 벽화 예술가인 프란체스코와 파트리샤가 진행하는 예술 활동, 난타와 연극 활동 등이 진행되었고, 때때로 바다나 산으로 야외 활동을 하러 갔다. 물론 나와 하이디는 그 모든 과정에 동참했다.   
약 이틀 동안은 산에서 시간을 보냈다. 비록 딱딱한 산장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자야 했지만 우리는 모두 다 함께 모여 잘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나의 서투른 이탈리아어는 오히려 아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맥주 한 잔 주세요"(Vorrei una birra, per favore.)라는 말은 정확히 알아두고 싶어서 아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원했던 표현을 익힌 순간부터 틈만 나면 맥주 한 잔 달라고 말을 걸었더니 아이들이 너무도 좋아했다. 호기심이 많고 배우는데 열심인 아이들은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었다. 이를테면 한 아이는 나폴리로 소풍 갔을 때 처음 알게 된 사실을 신나는 표정으로 말해주었다. “마가리타 피자 있죠, 왜 이름이 ‘마가리타’인지 알아요? 마가리타는 이탈리아 요리사들이 처음으로 피자를 만들어 바친 여왕의 이름이에요. 항상 비슷한 음식들에 질린 여왕이 요리사들에게 새로운 스타일의 음식을 요구했고 이에 고민하던 요리사들이 만들어낸 게 마가리타 피자래요. 나폴리에 갔다가 알게 되었어요.”   
푸른 나무로 둘러싸인 산길을 다 함께 걸으니 기분이 완전히 상쾌해져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즐겁게 산책을 했다. 이미 둘도 없는 단짝이 된 하이디는 이런 내 모습에 무척 즐거워했다. 산책에서 돌아와서는 나무들이 울창한 곳에서 한국 대 영국으로 팀을 나눠 깃발 쟁탈전을 펼쳤다. 새파란 하늘 아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쨍쨍 울려 퍼졌다. 저녁을 먹은 뒤엔 함께 누워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산중이라 그런지 별들이 참 맑았다. 모두가 돌아가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도란도란 나누는데, 나 역시 맑은 별들 아래에 있으니 꽤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았다.    
나를 ‘리틀 수’라고 부르며 아껴주었던, 다정다감한 시칠리아 가족을 떠날 땐 한참을 울었다. 의지할 곳 없는 낯선 나라에서 만난 정다운 친구들과의 이별은 늘 힘들다. 이탈리아 아이들은 내가 떠나기 전날 이미 눈물을 쏟았다. 펑펑 우는 것도 모자라 오열하는 아이에게 “안녕? 난 여기 있는 고양이 동생이야.” 하며 말도 안 되는 고양이 흉내를 내며 달래줬는데, 막상 떠나는 순간이 다가오자 이번엔 내 눈물이 왈칵 터지고 말았다. 말이나 제대로 통할까 싶어 전전긍긍하며 시작했던, 열한 명의 이탈리아 아이들과 함께한 여름 캠프는 강렬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만난 따뜻한 시칠리아 사람들은 늘 내 이름을 연호하며 넘치도록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이탈리아를 떠난 후에도, 스테파니아는 다정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수, 네가 하는 여행은 비록 느리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세상을 구하는 여행이야." "네가 써준 엽서를 읽는 게 무척 감동적이어서 우리 모두 다시 울기 시작했어. 넌 정말 특별한 영혼을 가지고 있고 우린 네 꿈이 모두 이루어지길 바라. 네 상냥함과 순수한 내면을 우리와 공유해 주어 고마워. 우린 모두 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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