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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호/컬쳐노트] 조금 덜 끔찍한 세상으로의 초대

양인영 기자l승인2020.06.15l수정2020.06.1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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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자신보다 약해 보이기 때문에, 혹은 실제로 덜 나은 입장에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너무 많다. 만만해 보여서, 만만해서, 어린 여자애라서, 드세게 반박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런 이유로 나에게 험한 말을 퍼붓는 사람은 얼마나 많았으며, 그중 중년의 남성을 대할 때는 없던 예의가 저절로 생겨나던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앞으로 누군가의 날 선 악의가 나를 향할 때면, 심시선 씨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외국인, 그중에서도 동양인이라서, 여자라서, 젊어서, 상대적으로 약자라서, 저 멀리 타국 땅에서 타인의 악의에 상처받은 사람. 하지만 상처 속에 남지 않고 일어나 가지를 뻗은 사람. 
심시선 씨는 대한민국 T면에서 태어난 화가이자 작가이다. 한국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하와이에 이민을 떠났으며, 그곳에서 만난 독일화가 마티아스 마우어와 뒤셀도르프로 이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수집품처럼 취급하는 마티아스의 폭력성과 그의 지인들의 저열함을 견디며 그림을 그렸다. 심시선 씨는 간신히 마티아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완벽히 놓여나지는 못했다. 마티아스는 그의 숨이 멎는 순간까지 심시선 씨를 파괴하고 싶어 했고, 그의 계획이 성공하자 온 유럽의 악의가 심시선 씨에게 향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돌아와 글을 썼다. 
그 많은 악의 속에서 살아남아 한국으로 돌아온 심시선 씨는 사람을 피해 살지 않았다. 많이 말하고, 많이 적었다.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라고, “제사는 사라져야 할 관습”이라고, “집안의 대소사는 큰딸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딸들에게는 진취적인 말들을 잔뜩 해주고, 아들에게는 작은 존재를 위해 몸을 낮추는 남자가 되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심시선 씨로부터 뻗어 나온 자식들은 또 기세 좋고 개성적이라서, 제사를 지내지 말라던 어머니를 위해 딱 한 번만 아주 특별한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 심시선 씨가 살았던 북태평양의 풍광 좋은 휴양지, 하와이에서. 
“시선으로부터,”는 가족들이 하와이에서 제사를 준비하며 진행된다. 그들은 심시선 씨와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언뜻 심시선 씨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심시선 씨가 눈치채지 못했던 음습한 악의를 발견하기도 하고, 세대를 거쳐 계속해서 반복되는 같은 형태의 가해에, 크게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 분노하기도 한다. 심시선 씨와 같은 형태로 상처받았던 화수는 책이 끝날 때 즈음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이 세상에 살러 오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곳은 공기가 너무 따갑다고. 
우리 세상에는 약자에게 잔인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여성만 골라서 ‘묻지 마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 아파트 경비원을 끌고 가 폭행하는 사람, 가출 청소년을 돈으로 꼬드겨 착취하는 사람, 비무장 시민에게 최루탄을 던지는 대통령과 국가주석… 그 사람들이 내뿜는 악의는 선명하고 뾰족해서, 도저히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가 없어서 아팠다. 이 끔찍한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사실이, 이 세상에 다음 세대의 사람들을 초대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이 비열하고 음습한 악의를 끊어서 건네주고 싶은데,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 나 하나 살아나기도 힘들어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무력감에 빠질 때마다 심시선 씨를 기억하려 한다.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을. 우리를 뒤덮은 악의를 끊어주지는 못해도 조금쯤 얇게 만들어서 건네준 사람을. 그가 존재한 적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리는 날에는 정세랑을 기억하려 한다. 끔찍한 세계를 포근한 팬케이크로 덮어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악의로 가득 찬 인간과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를 무해한 인간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을. 그리고 다시 힘을 내서, 다음 세대를 초대할 세상을 조금 덜 끔찍한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


양인영 기자  071255@bl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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