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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호/컬쳐노트] 책과 영화가 비추는 현실, <82년생 김지영>

양인영 기자l승인20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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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씨는 1982년 4월 1일, 서울의 한 산부인과 병원에서 키 50센티미터, 몸무게 2.9킬로그램으로 태어났다. 김지영 씨 출생 당시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주부였다.’

마치 어딘가에 김지영 씨가 실존할 것만 같은 서술이다. 작가는 “자꾸만 김지영 씨가 진짜 어딘가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주변의 여자 친구들, 선후배들, 그리고 저의 모습과도 많이 닮았기 때문”일 거라고. ‘82년생 김지영’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건들을 나열하며 1982년에 태어난 김지영 씨의 생을 그려낸다. 지난 10월 23일 개봉한 동명의 영화 역시 김지영 씨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떠한 반전도 없는, 그저 보편적인 한 사람의 일생을 그려낸 영화임에도 관람객들의 감동을 자아내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소설과 영화는 모두 김지영 씨의 삶을 통해 현실을 조명한다. 우리 사회가 사회적 약자에게 얼마나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지, 얼마나 쉽게 타인을 상처 주는지, 그러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지를.

작품 속에서 학창 시절 김지영 씨는 밤늦은 시간에 버스를 타고 귀가한다. 그런 김지영 씨를 모르는 남학생이 뒤쫓는다. 외진 정류장에 함께 내린 남학생은 김지영 씨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듯 행동했다고 주장하며 위협한다. 다행히 함께 버스를 탄 승객이 뒤늦게 따라내려 아무 일도 없었지만,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은 김지영 씨의 아버지는 “그러게 왜 조심을 안 하냐”며 화를 낸다. 아버지는 “바위가 굴러오면 피할 생각을 해야지 못 피하면 못 피한 사람 잘못인 거야”라며 아무한테나 웃지 말라고, 단정히 입고 다니라고 김지영 씨를 혼낸다. 만약 정말 바위라도 굴러왔다면, 원인 없는 천재지변이었다면 김지영 씨가 피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토킹은 사람이 저지르는 범죄이고 그 잘못은 명확하게 가해자에게 있다.

밤길을 가다 대뜸 폭행을 당한 사람에게, “그러게 왜 그 시간에 거길 지나갔느냐”, “그러게 허리를 쫙 펴고 당당하게 다녀야지” 따위의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앞에 ‘성(性)’자가 붙으면 “네가 옷을 단정치 못하게 입은 것은 아니냐”, “네가 먼저 여지를 준 것은 아니냐” 라며 원인을 피해자의 안에서 찾으려고 한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먼저 유혹하고는 성범죄를 당했다고 주장한다”라며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기도 한다. 성폭력 피의자 대비 성폭력 무고 피의자 비율은 1%도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말은 우리가 성범죄 피해자에게 얼마나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는지를 시사한다.

시간이 흘러 육아를 하게 된 김지영 씨는 아이를 데리고 오다가 커피를 한 잔 사 들고 공원에 가 앉는다. 날이 좋아서, 오랜만에 밖에서 마시는 커피는 맛이 좋아서, 김지영 씨의 마음은 잠시 평온해진다. 그런 김지영 씨를 보고 옆 벤치의 남자 하나가 말한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김지영 씨는 도망치듯 공원을 떠난다.

‘맘충’이라는 단어는 엄마를 뜻하는 영어 단어 mom에 벌레 충(蟲)자를 붙여서 만든다. 원래는 공공질서를 지키지 않고 자신들의 자녀만 챙기는 일부 이기적인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점차 변질되어 육아를 전담하는 엄마를 비하하는 단어로 쓰이고 있다. 김지영 씨는 말한다.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 …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김지영 씨에게 쉽게 맘충이라는 단어를 쓴 사람은, 김지영 씨가 살아온 삶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김지영 씨가 출산을 위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이 꿈꾸던 삶도 포기하고, 출산 후 상한 몸을 이끌고 온종일 가사 노동을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한 부분의 단편적인 모습만 본 채, 단지 특정 집단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안일하고 무심하게 잔혹한가. 김지영 씨의 말은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가벼운 마음으로 타인에게 상처 주고 있었는지 꼬집는다.

이 밖에도 ‘82년생 김지영’은 기계가 발달했는데 가사노동이 뭐가 힘드냐고 핀잔을 주는 의사를 통해, 같은 회사 직원들이 촬영된 불법 촬영물을 신고하지 않고 돌려본 과장을 통해, 유능하지만 더는 승진하지 못하는 팀장을 통해,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가사 노동을 ‘집에서 논다’라고 평가 절하 하는 사회를, 불법 촬영물을 유포하고 범죄를 방조하고도 가볍게 생각하는 사회를, 아직도 존재하는 유리천장을 고발한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당신과 나의 이야기”라는 영화의 캐치 프라이스처럼, 현실에서 흔히 일어나지만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점들이 소설과 영화를 통해 재조명된다.

작가는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될 것이라 믿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노라고 말한다. 소설 속에서, 영화 속에서, 이 메시지는 여실히 드러난다. 김지영 씨의 할머니가 딸인 오미숙 씨에게, 오미숙 씨가 김지영 씨에게, 더 나은 세상을 주고자 한다. 작품 속에서 오미숙 씨는 말한다.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지영이들이 얌전히 있지 않고 ‘막 나댈’ 때, 조금씩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문제를 제기할 때,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세상을 건네줄 수 있다.


양인영 기자  071255@knue.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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