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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호/사설] 길보드 차트, 서바이벌 경연, 그리고 버스킹

한국교원대신문l승인201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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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길보드 차트라는 것이 있었다. 길거리 리어카는 매주 인기곡을 골라 복사해서 앨범을 만들고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틀어댔다. 거리에서 많이 틀고 있는 순으로 인기순위를 결정한다고 하여 길보드 차트였다. 그러니 음악을 좋아하든 말든, 좋아하는 장르가 발라드이든 댄스이든 상관없었다. 번화한 거리를 지나다보면 당시에 유행하는 음악을 자연스레 듣게 되고, 그 노래는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 나름의 사연 이 되어 흘러갔다. 누구는 만날 때 누구는 헤어질 때 그 음악이 흘렀다. 당시의 대중음악이란 사람들의 일상에 흐르던 배경음악 같은 것이었다. 거리의 음악이었기에, 지금도 그 노래가 나오면 사람들은 함께 흥얼거리게 되고, 그 노래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기억들을 떠올리게 된다.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확산되면서 사람들의 일상 속에 느꼈던 길거리의 음악은 사라졌다. 대신 사람들은 TV 속 무대를 보며 자기 집 소파를 심사위원석으로 만들었다. 바로 서바이벌 형식의 음악 경연 프로그램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이러한 프로그램이 등장했을 때는 어떻게 음악에 점수를 매기고, 줄을 세우고, 한 명씩 떨어트리는 서바이벌 형식이 가능하냐며 거부감을 나타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음악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시대에 생긴 무대이었기에 많은 가수들과 지망생들은 결국 그 자리에 섰다. 이후 10여 년간 약간의 변주만이 있었을 뿐 서바이벌 형식의 음악 프로그램은 대중음악을 전달하는 주류가 되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시청자로 하여금 심사위원의 눈으로 음악을 소비하도록 만들었다. 그저 듣기에 좋은 노래 정도로만 구분하던 음악 문외한들도 심사위원들이 하는 심사평을 학습하면서 음악을 보고 들었다. 비가 내려서, 찬바람이 불어서, 내 마음과 꼭 같은 가사여서 좋다고 말하는 것은 객관성이 떨어진다. 음색, 박자감, 성량, 비브라토, 무대 매너, 무대 구성과 같은 기준들을 하나씩 들이대보며 공정한 점수를 매기기 시작했다. 일상에 흐르던 음악 속에 나의 이야기를 얹었던 것과 달리, 무대 위로 음악이 옮겨지고 나서는 규격화된 침대를 놓고 긴 다리는 자르고 짧은 다리는 늘리는 프로크루스테스 노릇을 시청자가 함께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대 위의 공연을 보는 내내 우리는 ‘쟤가 제일 잘했네! 제일 못했네!’ 라며 누구를 고를지에 열중하였던 것이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변주로 원석을 찾아 스타를 만든다는 오디션 프로그램은 최근까지도 인기였다. 그저 평범하거나 불우했던 아이가 화려하게 무대 위에 오르는 스토리를 통해 재미와 감동을 주었다. 교복을 입고 온 평범한 학생이 단 몇 번의 프로듀싱을 통해 멋있어지고, 노래 스타일이 달라지고, 세련된 안무를 선보였다. 이러한 변신의 과정을 보면서 원석을 발견한 프로듀서의 안목에 놀라고 근사한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재주에 시청자들은 감탄하였다. 이러한 서바이벌 형식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가 ‘어리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강점이었다. 아이의 잠재력만 보고 투자하여 짧은 시간 내에 극적인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미 노력한 흔적이 배어 습관화된 부분이 있다면 스무 살만 넘어도 늦은 것이었다. 스무 살에게 ‘너무 늦었다’라는 말을 하는 사회는 얼마나 무섭고 폭력적인 사회인가? 공공연하게 조로(早老)를 권하는 사회가 아니었나 싶다. 서바이벌 경연의 형식은 ‘서바이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무대에 오를 최후의 승자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소멸하게 되는, 지속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형식이다.

서바이벌 형식의 노래를 향유하는 방식은 이제 정점은 지난 듯하다. 경연이 주는 긴장에 피로감을 느끼고, 다양한 소리, 색깔, 해석이 사라지는 현실에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그래서 완성된 하나의 노래를 평가하기 보다는 만드는 과정에 귀 기울이고 음악으로 소통을 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버스킹’ 형식을 통해 무대에 머물던 노래가 다시 거리로 나오기도 했다. 특정한 장소와 시간 속에서 음악이 흐를 수 있도록 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 다가가는 음악이 등장한 것이다. 이는 노래를 평가하고 한 명의 승자를 뽑는 구도와는 매우 다른 접근이다. 그리고 더 최근에는 뮤직 릴레이라고 하여 드럼 비트에서 출발하여 악기가 하나씩 얹어지면서 풍성해지는 음악, 소리를 먼저 듣고 거기에 화답하는 공명(共鳴)이 중심이 되는 형식이 등장하였다. 다른 사람의 만들어낸 소리를 듣지 않으면 애초에 만들어질 수 없는 음악 말이다.

본래 ‘노래’란 ‘놀다(遊)’의 어간 ‘놀’에 명사화된 접미사 ‘애’가 붙어 만들어진 말이다. 노래가 가장 노래다울 때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놀이가 되었을 때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의 일상에 노래가 흐르고 때로는 같이 흥얼거리며 공명을 만들어가는 감상법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노래’와 ‘감상’이라는 말 위로 ‘교육’과 ‘평가’라는 말도 한 번 가만히 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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