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19.11.13 수 21:47

[432호/교육칼럼] 결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허지훈 기자l승인2019.09.30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특정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모두 그 대상”이라는 정의 방식을 결과 위주 정의라 한다. “물건을 실어 나르는 것”으로 자동차를 생각한다면 이는 결과 위주의 정의에 가깝다. 물건을 실어 나르는 것은 모두 자동차가 된다. 위 방식은 자동차의 기능을 제시하며 편리성의 측면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물건을 실어 나르는 것이 자동차라는 정의에 의하면, 자전거나 손수레, 심지어는 동물도 자동차가 될 수 있다. 이는 자동차의 경계를 흐리고 자칫 자동차가 아닌 것을 자동차인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 자동차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결과를 통하기보다는 엔진 등 자동차의 작동원리 및 기관의 구조를 통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특정 결과를 달성하는 대체 수단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런 식의 정의에는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그러한 결과 위주의 교육관만으로는 교육의 실체를 충분히 밝히지 못한다. 예컨대 세뇌, 고문, 훈련, 교조화, 조건화, 약물투여는 모두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이처럼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대체 수단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세뇌나 고문, 훈련, 교조화, 조건화, 약물투여 등은 교육일 수 있다. 특정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교육이라는 식의 정의는 교육과 교육 아닌 것의 경계를 흐린다. 교육을 교육이 아닌 것으로, 교육이 아닌 것을 교육으로 왜곡시킬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세뇌나 고문, 훈련, 교조화 등을 교육으로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지식교육’이라는 용어는 “지식을 알게 하는 것”의 수준으로 흔히 사용된다. ‘지식교육’의 지칭 대상 모두가 교육인 것은 아니다. 세뇌, 고문, 훈련 등을 통해서도 그 결과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체가 교육이 아닌 대상을 교육으로, 우리는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와 같은 결과 위주의 교육관은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육의 실체를 밝히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심지어는 교육과 교육이 아닌 것을 오해하게 한다. 그 실체를 제대로 밝히기에는 교육을 결과 위주로 정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교육의 원리 등 교육의 고유가치를 통하는 것이 그 실체에 부합하는 것 같다. 세상 사람 모두가 교육의 실체를 밝혀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교육의 전문가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결과 위주의 교육관에 더하여 그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교육관을 고민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허지훈 기자  hjh8497@knue.ac.kr
<저작권자 © 한국교원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허지훈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처리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이전홈페이지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태성탑연로 250  |  대표전화: 043) 230-3340  |  Mail to: press@knue.ac.kr
발행인: 류희찬  |  주간: 손정주  |  편집국장: 박설희  |  편집실장: 김동건/전은진/정윤수  |  청소년보호책임자: 박설희
Copyright © 2019 한국교원대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