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19.10.22 화 22:28

[431호/기자칼럼] 병명은 변명이 아니다

현정우l승인2019.09.16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며칠 전에 모임 사람들을 만날 일이 있었다. 정기적인 모임은 아니었고 간혹 만나는 비정기적인 모임이었기에 서로 얼굴을 기억할 일이 많지 않았다. 1년 전에야 뵌 분을 오랜만에 뵙게 되어서 먼저 인사를 했다. 내가 지나가다가 살짝 뵈었었는데 맞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아서 차마 인사를 못 드렸다고 하자 그분이 대답을 했다. “아, 제가 안면인식장애가 있어서 먼저 인사를 못 드렸네요.”

그 말을 듣자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친구와 밥을 먹고 더 얘기를 나누기 위해 카페로 갔을 때였다. 카페에 앉기 전에 먼저 메뉴를 고르는데 친구가 고르기를 영 주저하는 것이었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왜 이렇게 고르는데 오래 걸리느냐.”하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미안. 내가 선택장애가 좀 심해서.”

‘분조장’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를 처음 접한 곳은 터무니없게도 여치라는 곤충의 특징을 설명한 한 인터넷 게시글이었다. 시골에 살다 보면 바퀴벌레보다도 여치가 더 무섭다며, 바퀴벌레는 그래도 눈치를 보고 피하는데 여치들은 거의 매 순간 분조장이라도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이었다. 그 말은 여치가 공격성이 강해 사람과 충돌할 경우 먼저 달려들고 보는 습성을 묘사하기 위해 쓰였던 것이었다. ‘분조장’은 분노조절장애를 줄인 말이었다.

안면인식장애와 선택장애는 실존하는 병명일까? 안면인식장애는 그렇다. 우리의 뇌는 네 가지 부분, 앞쪽의 전두엽과 뒤의 위쪽에 있는 두정엽, 뒤쪽의 후두엽, 뒤 아래쪽에 있는 측두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측두엽의 오른쪽 부분에 손상이 생길 경우 얼굴에 관한 기억 저장이 어려워진다고 한다. 이 경우 안면인식장애라고 불리는 질환이 생길 확률이 높아지며, 알츠하이머병이나 치매와 동반해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반면 선택장애는 학계에 기록된 질환명이 아니다. 햄릿증후군이라는 외국어 이명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두 용어 모두 선택에 있어 머뭇거리는 습관을 일컫는 신조어이다

분노조절장애 또한 실존하는 병명이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사례들에서 ‘장애’라는 단어는 다른 이의 특성을 압축하거나 스스로의 행동을 대변하기 위해 쓰였다. 물론 스스로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병명은 타인을 단정 지을 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병명은 누군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얘기할 때나 그 병명의 특징을 기술할 때 사용하는 것이다. ‘분조장’이라는 축약어는 원본 단어가 얼마나 자주 쓰이는지를 보여준다. 이 단어들은 모두 꼭 필요한 상황에만 쓰이고 있는 걸까? 스스로를 ‘안면인식장애’나 ‘선택장애’라고 일컬었을 때도 꼭 필요한 상황이었을지 의문이 든다. 그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그 병에 걸려있다는 진단서, 확실한 의사의 소견서를 갖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왜 스스로를 ‘장애’라고 칭했던 걸까? 우리는 언제부터 별명으로, 특징으로, 변호하기 위해서 ‘장애’라는 단어를 쓰게 된 걸까?

 

현정우

jungwoohyun@knue.ac.kr


현정우  jungwoohyun@knue.ac.kr
<저작권자 © 한국교원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현정우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처리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이전홈페이지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태성탑연로 250  |  대표전화: 043) 230-3340  |  Mail to: press@knue.ac.kr
발행인: 류희찬  |  주간: 손정주  |  편집국장: 박설희  |  편집실장: 김동건/전은진/정윤수  |  청소년보호책임자: 박설희
Copyright © 2019 한국교원대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