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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호/독자의 시선] '자아'는 '개인'일 수 있는가

박효경(초등교육·17)l승인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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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한 학생에게 아파서 결석한 친구의 청소 구역을 대신 청소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학생은 “제가 맡은 청소 구역이 아닌데 왜 그래야 하나요?”라고 (악의 없이) 반문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의 단면이다.
노키즈존(영유아 및 어린이의 입장을 금지하는 업소), 틀딱(인터넷에서 노인을 비하해 부르는 멸칭), ‘나만 아니면 돼’, 이들은 현대 사회의 언어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불신, 여러 대학교에서 총학생회가 서지 않고, 총학생회의가 무산되는 일. 자발적으로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대표가 나오지 않는 공동체들. 이것이 현대 사회의 문화이다.
현대 사회는 어떠한 사상이 지배하고 있는가?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 하에 윤리학은 어떤 삶이 올바른 삶인지에 대한 ‘기준’이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모든 다양한 삶이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고, 도덕적 판단의 불일치 현상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윤리학을 ‘통약불가능성’이라고 명명하고,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바로 맥킨타이어이다. 맥킨타이어는 이러한 현상이 계몽주의를 계기로 하여 마련되었고,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에 와서 극대화되었다고 한다.
맥킨타이어는 ‘다원주의’와 ‘도덕적 상대주의’로 표현할 수 있는 현대 윤리학의 문제를 ‘목적성’의 부재에서 찾는다. 고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있었고, 중세에는 아퀴나스의 유신론적 목적론이 있었다. 하지만 종교 개혁을 거치고 계몽주의 사상이 들어서면서 목적은 침묵되어 왔다. 계몽주의자들은 중세까지 이어져 내려오던 도덕의 3중 구조의 도식(우연히 존재하는 인간, 도덕적 계율,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때에라야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을 2중 구조(우연히 존재하는 인간, 도덕적 계율)로 바꾸었다. 즉, 공리주의자들은 목적성을 ‘경험적’으로 정당화시켰고, 칸트는 ‘선험적’으로 정당화시켰다는 차이만 있을 뿐, 그들의 철학에는 공통적으로 ‘목적성’이 없다.
맥킨타이어에 의하면 계몽주의자들의 도덕 정당화 방식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추상의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계율의 ‘목적’과 ‘인간의 참된 본성’이라는 요소가 제거된 윤리학에서 ‘자아’는 세계와 분리된다. 고립되어버린 자아는 실천적 자아가 아닌, 추상적 자아에 그쳐버리게 된다.
목적성이 없는 세계에서 개인은 파편화되고, 모든 도덕적 판단의 주체로 전락한다. 따라서 타인에게 신경을 쓰는 것은 ‘오지랖’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나의 삶이 있고, 타인은 타인의 삶이 있기 때문에 타인과의 소통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와 타인의 차이를 좁히려고 하기보다는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삶을 외면하게 된다. 그래서 앞서 말한 특정 계층을 멸칭하는 현대 사회의 언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현대 사회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 자아는 온전한 ‘개인’일 수 있는가? 우리는 사회에서 공동체를 구성하고 살아가고 있다. 내가 자발적으로 공동체에 속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혹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써 보아도 사회의 영향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물질적인 것들, 개개인의 가치관들은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 결국 ‘자아’를 ‘개인’과 동일시하는 추상적인 자아관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상실하였다는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맥킨타이어는 이를 복원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의 개념을 세속적인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이는 현대사회의 사람들이 더 이상 과거의 형이상학적인 목적으로는 설득되지 않기 때문에 경험적인 대응물을 이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덕’을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닌, 역사적, 사회적 제약 속에서 생겨난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기준이라고 본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예절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맥킨타이어는 ‘실천’(practice), ‘인간의 삶의 서사적 단일성’(the narrative unity of a human life), ‘전통’(tradition)의 개념을 도입하여 덕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산물임을 입증한다.
‘실천’이란 선을 내재하고 있는, 혹은 덕의 활용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 일체를 뜻한다. 즉, 덕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는가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실천’만으로는 덕을 설명할 수 없다. 사람마다 ‘실천’이 다양하기 때문에 충분히 악을 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인간의 삶의 서사적 단일성’이 도입되고, 이를 통해 행위의 ‘맥락’이라는 개념이 드러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통해서 이해해보자. ‘신데렐라가 유리 구두를 잃어버린 행위’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신데렐라가 요정을 만나지 않았다면 유리 구두를 잃어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신데렐라가 유리 구두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왕자와 다시 만나는 사건이 생긴다. 이처럼 이야기에는 처음과 끝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하고, 이러한 연속성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 역시 마찬가지로, 사회의 맥락 속에서 이해가 가능한 ‘사회적 행위’이다. 이렇게 바라보면 덕은 개별적 인간의 모든 행동 속에 들어 있는 ‘사회적 의미’를 가리키게 된다. 이 때 ‘전통’은 사회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개인이 하는 낱낱의 ‘행위’는 ‘전통’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서사’ 속의 한 장면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실천’은 ‘전통’이라는 무대와 ‘서사’라는 맥락 속에서 비로소 이해가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맥킨타이어는 인간이 삶을 통하여 실현하는 이야기들이 ‘예측불가능성’과 더불어 부분적으로 ‘목적론적’ 성격을 함께 가진다고 했다. 인간이 이야기를 말하는 동물이라면, 인간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기 전에 우선적으로 ‘나는 어떤 이야기의 부분인가’에 대한 대답이 필요할 것이다. 결국, 맥킨타이어는 도덕의 3중 구조 도식에서 소실된 ‘목적’을 현대적인 의미에서 복원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맥킨타이어는 덕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다른 각각의 사회에서 그 사회구성원들에 의하여 추구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온건한’ 상대주의로 가게 될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초월적이고 통시적인 목적을 불러오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킨타이어의 현대 사회에 대한 통찰은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현대 우리 사회는 ‘자아’를 세계와 분리된 ‘개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또한, 나의 이야기에는 내가 살아가는 세계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펼쳐져버린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써나갈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나의 이야기를 잘 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나의 이야기와 절대 같을 수 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야기를 가지고 온 타인이 곧 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사람의 이야기인 나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 줄 것인가? 우리를 위해 고민하자.


박효경(초등교육·17)  knue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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