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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호/기획] 광주 5·18 민주화운동 39주년, 끝나지 않은 그 날의 기억

이예림 기자 (편집 : 오승혁 기자)l승인2019.05.20l수정2019.06.0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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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조사천의 영정사진을 든 '꼬마 상주'

1980년, 광주에서 자행된 5·18 민주화운동이 올해로 39주년을 맞이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과 미군의 지휘를 받은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 등을 외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다. 39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사건의 주동자인 전두환과 당시 신군부 세력은 사건을 은폐하려고만 한다. 이에 최근까지도 5·18 사태에 대한 증언은 계속 나오고 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많은 만큼 우리는 그 날의 아픔을 잊지 않아야 한다.

◇ ‘서울의 봄’을 짓밟은 전두환의 쿠데타
박정희는 집권 이후 삼선개헌,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을 통해 군사독재 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폭압성을 더해가던 군사독재에 1979년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부마항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1970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자 박정희의 부하였던 김재규가 박정희를 피살했다.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죽으면서 국민들은 드디어 우리나라에 올바른 민주주의가 정착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서울의 봄’을 꿈꿨다.
그러나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때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의 자리에 전두환이 앉게 된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전두환은 군을 장악하고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키며 독재집권을 꿈꾼다.
이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은 격분했다. 1980년 5월 초부터 민주화를 요구하며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불붙기 시작했다. 교내에서 시작한 시위는 5월 13일 이후로 교문 밖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5월 14일에는 서울 지역 22개 대학에서 모인 5만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오전 10시부터 밤까지 철야 시위와 횃불 시위를 벌였다.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이나 대구, 경구, 광주, 전주 등 지방 10개 도시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 
5월 15일에는 학생 시위가 절정에 달하면서, 서울과 지방의 대학생 10여만 명이 서울역에 모였다. 학생들과 시위를 진압하려는 경찰 사이의 충돌이 커지면서, 학생들은 일단 시위를 잠시 중지하자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학생들은 서울역에서 물러났지만,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에 전두환은 5월 17일 밤 10시 40분에 기습적으로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고, 김대중과 김종필 등을 연행하는 한편 김영삼을 가택 연금시켰다. 유력 정치인들의 손발을 묶어 국회에서 새로운 민주 헌법이 제정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불길은 더욱 거세지게 되었다.

◇ ‘화려한 휴가’라는 핏빛 시나리오
‘화려한 휴가’는 살인집단의 총칼에 당한 무수한 민중들의 생애를 극한적인 비극으로 만들어냈다. 시내 곳곳에는 피범벅 된 시체들이 나뒹굴었다. 싸우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었고, 싸우는 것만이 ‘민주’를 지켜내는 길이었다. 시민들은 무장투쟁을 하였다. 광주는 이제 단순한 지역적 차원의 의미가 아니라 민주화를 사랑하는 전 민중의 성지가 되었다. 1980년 5월의 광주 상황은 크게 4단계로 구분된다.

1. 18일, 19일: 계엄군의 계획된 과잉진압으로 시민들은 처참하게 학살당한다. 
2. 20일, 21일: 공분을 느낀 시민들이 단결된 힘으로 계엄군과 공수부대를 퇴각시킨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은 자위적으로 무장한다.
3. 26일까지: 죽음의 공포와 폭압적인 정치 권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치적인 민주공동체를 이루어 낸다.
4. 27일: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끝으로 계엄군은 도청 함락을 결행한다.

지금부터 이 중 가장 잔인했던 18일의 그 날을 설명하고자 한다.

<5월 18일, 피의 일요일>
전두환의 명령으로 인해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공수부대의 ‘화려한 휴가’가 시작된 것이다. 박정희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민주화의 열기는, 또 다른 군부 독재자의 손에 무참히 무너지게 되었다. 오전 10시경,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전남대 정문에는 2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정문을 막고 서 있는 계엄군이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을 차례대로 계속했다. 학생들은 ‘계엄군 물러가라’라고 시위를 했다. 학생들이 해산하지 않자 마침내 계엄군 20여 명이 진압봉을 들고 ‘돌격 앞으로!’ 하는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교문을 박차고 나왔다.
박달나무로 만들었다는 진압봉으로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며 연행해갔다. 10여 명의 학생이 무참히 끌려가는 것을 본 남은 학생들은 격분했다. 학생들은 30여 분 후 다시 시위대열을 형성하여 계엄철폐와 민주일정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은 즉시 해산하고 귀가하라”라는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지만, 시위대열은 흩어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방송에 맞서 구호를 외쳐댔다. “계엄군은 물러가라”, “계엄 철폐하라” 공수부대원들은 이윽고 돌격명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학생들에게 돌진해왔다. 정문 일대에는 삽시간에 비명과 공수부대원들이 내뱉는 욕지거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반 시민들에게도 욕지거리와 구타를 서슴지 않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두들겨 맞기도 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이렇게 피로써 시작되었다.

공수부대의 폭력장면

광주시민들은 계엄확대의 충격과 함께 전남대 피해 학생들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200여 명의 전남대 학생들은 11시경 광주역에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위대열은 공용터미널을 지나 금남로에 이르는 동안 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술렁거리던 시민들은 시위대열에 뛰어들었고 거리는 시민들과 학생들의 농성으로 완전히 메워졌다. 시민들의 동참이 점점 늘어나자, 일렬로 서 있던 경찰들이 포물선 형태로 시위대열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어제와는 달리 무차별하게 최루탄을 쏘아대며 시위를 저지했다. 학생들은 이 시위가 무모하다는 판단 아래, 시내 전역으로 나뉘어 시위를 전개하며 학생들과 시민들의 동참을 유도하기로 했다.
그 무렵 공수특전 7여단 2개 대대가 총을 매고 진압봉과 대검을 쥐고 투입되었다. 20여 명이 한 팀이 되어 광주 시내 주요지역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금남로, 충장로, 광남로, 계림동 등지로 사실상 광주 중심권 전역에 공수부대원들이 투입된 셈이었다. 학생들은 주요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를 벌였고, 청년들이 합세하기 시작해 시위 인원은 2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지역배치를 끝낸 공수부대원들은 본격적인 학살을 감행했다. 그들은 대검과 진압봉을 앞세워 곧바로 시위대를 향해 돌격했다. 학생들은 전남대 정문 앞에서 겪은 상황을 떠올리고 칼날을 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좁은 골목을 찾아 숨어들었지만, 공수부대원들은 끝까지 추격했다. 주택으로 숨어든 사람들도 공수부대원들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힌 시위대원은 남녀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당하고 말았다.
일시적으로 잠잠해졌던 시위는 오후 3시가 되면서 재개되었다. 2천여 명의 시위대는 외곽지대를 돌며 시민들의 동참을 유도하기로 했다. 무전 연락을 받은 전투경찰은 곧바로 시위대에게 최루탄을 쏘아댔다. 진압방법이 오전과는 달랐다.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위대를 밀어붙이기만 했다. 계림동과 산수동에서 밀리기 시작한 시위대는 자연스럽게 공용터미널 광장에 합류되었다. 금남로와 연결되는 도로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들도 밀려 대부분의 시위대가 공용터미널 광장에 모이게 되었다. 학생들은 이러한 경찰의 밀어붙이기식의 진압이 작전의 일환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들은 시내 일원의 모든 시위대를 한곳에 집결하도록 만든 것이다.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던 공수부대가 대검을 꽂은 총을 앞세우고 시위대의 전면과 후면으로 일시에 나타났다. 시위대는 공수부대를 보자 대항할 엄두도 못 내고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시위대의 상당수가 공수부대원들의 대검과 진압봉으로 살상당한 채 트럭 위로 던져졌다. 그리고 그 트럭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바탕 광기 어린 살상이 지나간 공용터미널 일대는 마치 전쟁터를 연상케 했다.

◇ 광주학살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다
최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증언들이 물밀 듯이 나오고 있다. 최근 5·18 당시 보안사 505 보안대 특명부장 허장환과 미군 501정보 여단 군사정보관 김용장은 5·18은 철저히 기획된 사건이며, 27일 발포 직전에 전두환이 광주를 다녀갔다는 것을 밝혔고, 특히 앉아 쏴 자세로 집단 사격을 했으며 이는 발포 명령이 아닌 사살 명령이란 주장을 제기했다. 또한, 광주통합병원에서 희생자 시신 200구 정도가 소각됐다고 추측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를 계산해도 행방불명자 수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시신을 어디론가 다른 지역으로 수송했을 가능성에 대해 증언했다.
5·18 민주화운동의 최후 유혈진압 작전인 '충정작전'을 보고받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굿 아이디어'라고 칭찬했다는 내용의 문건도 나왔다. 15일 1980년 당시 2군 사령부가 작성한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에 따르면 그해 5월 23일 당시 진종채 2군 사령관이 대구와 서울, 광주 등을 방문해 충정작전 계획을 건의·보고했다는 내용이 있다. 진 사령관이 방문한 지역 가운데 '서울'에 동그라미가 있고 '각하(閣下)께서 "굿 아이디어(Good idea)"'라는 메모가 기록됐다. 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유혈진압 작전의 최종 승인권자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인 셈이다.

◇ 공수부대에 의한 무고한 죽음

이름 : 김경철
생년월일: 1952년 8월 11일
직업: 제화공
사망일시 및 장소: 5월 19일
사인: 후두부 타박상

어려서 약을 잘못 복용해 말을 듣지도 할 수도 없게 된 김경철은 광주학살에 투입된 공수부대에게 최초로 희생된 사람이다. 광주농아협회 관리부장이었던 김경철은 서울에서 내려온 처남을 바래다 주기 위해 5월 18일 오전에 터미널로 나갔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금남로 지하상가 공사현장 근처에서 공수부대에게 붙들려 전신을 짓이기는 구타를 당하고 사망했다. 공수부대가 처음으로 시내에 투입된 시간이었다.

그가 공수부대에게 둘러싸여 두 손을 빌며 두들겨 맞는 광경은 여러 사람이 목격했다. 그는 공수부대의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어서, 그들의 지시와 요구에 대답할 수 없어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 없어서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벙어리에 귀머거리인 김경철이 계엄령 철폐를 요구할 수도 없었고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 한마디 외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 광경을 목격한 시민들에 의하면 말 못하는 그에게 공수부대는 거짓말을 한다고, 대답하지 않는다고, 벙어리 흉내로 장난친다고 구타했다고 한다.
공수부대가 자신을 왜 구타하는 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자신은 시위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설명할 수도 없었던 그는 그저 두 손으로 빌며 처절하게 두들겨 맞았던 것이다.

이름 : 박금희
생년월일: 1963년 7월 13일
직업: 학생(전남여상 3학년)
사망일시 및 장소: 5월 22일, 기독병원 앞 양림다리
사인: 복부 총상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된 지 나흘만에 시내의 병원들은 사상자로 가득찼다. 사망자들은 영안실의 수용능력을 넘어 마당에 뉘여져 있었고, 부상자들도 입원실이 부족해 현관과 복도 등 바닥에 누워있었다. 뿐만 아니라 광주는 철저히 고립된 채 그들을 치료할 의약품과 혈액이 바닥났고 의료진도 턱없이 부족했다.
학교에서 선도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집안에서는 8남매 중 장녀였던 박금희는 시내를 돌며 헌혈을 호소하는 방송차량을 보고 곧장 기독병원으로 향했다. 한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들어선 병원은 얼룩진 핏물과 부상자들의 신음소리로 인해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부상자들의 고통은 공수부대의 학살로부터 광주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자신이 그들과 동참하는 길은 헌혈밖에 없었다.
헌혈을 마친 박금희 양은 부상자들의 고통과 사망자들의 처참함과 한편으로는 자신도 동참했다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병원을 나와 양림교에 이르렀을 때 공수부대의 총탄이 그녀의 복부를 관통했다. 조금 전 헌혈을 했던 기독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내 숨을 거두었다.

 

이름 : 안종필
생년월일: 1964년 5월 23일
직업: 학생(광주상고 1학년)
사망일시 및 장소: 5월 27알 도청 앞
사인: 총상

 

 

성실한 신앙생활 때문이었는지 안종필은 남달리 인정이 많았다. 새벽부터 친구들의 신문을 대신 돌리는가 하면 주위에 구두닦이 아이들이 있으면 어머니가 경영하던 식당에 데리고 와 고기를 먹이곤 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위었지만 그의 구김살 없는 성장은 어머니에게는 늘 대견했다.
안종필은 가족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선배들이 다 죽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느냐”면서 18일부터 줄곧 시위에 참여했다. 가족들이 “그러다 개죽음 당하면 너만 손해다”라며 만류하자 “이번 죽음은 절대 개죽음이 아니다”라고 애써 설득하려 했다. 여전히 식구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자 그는 밤중에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25일 저녁 무렵에 다시 집에 들어온 안종필은 도청에서 자기가 하는 일이 지하실에 안치된 시체를 가족들이 확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시체들을 보면 무섭지 않냐는 가족들의 물음에 “그들의 죽음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비참한 것이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27일 새벽, 그는 수습대책위원으로 일하고 있었고 집에 들어가자는 어머니의 권유를 뿌리쳤다. 그리고 그 날 총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이예림 기자 (편집 : 오승혁 기자)  yearim99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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