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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호/사무사]거울 속의 반짝임

편집장l승인201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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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동전을 주었다가 친구에게 핀잔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 다리가 불편해 보여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말하자, 친구는 그건 다 흉내일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밤이 되면 멀쩡하게 걸어서 집에 갈 거라고. 너는 그 사람에게 속은 거라고.

그날 이후 나는 종종 그 말을 떠올렸습니다. 네 달 동안 목숨을 걸고 인천공항에서 노숙한 앙골라인 가족이 난민 신청을 거부당했을 때. 계부의 성적 학대 사실을 경찰에 신고한 열두 살 어린이가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계부에게 보복 살해당했을 때. 산 채로 난도질당한 채 버려진 강아지의 사진을 보았을 때. 이제 이런 소식을 들으면 슬픔과 분노보다 강한 무력감이 먼저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나는 속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선의, 희망, 연대 같은 단어들이, 세상은 결국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리라는 믿음이, 사실은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결국 모든 게 그저 나빠지기만 하고, 우리의 모든 행동은 사실 무용한 것은 아닐까요.

 

며칠 전 조치원역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좌판에서 땅콩을 파는 할머니가 나를 붙잡았습니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돈이 없다고. 결국 땅콩 한 봉지를 사들고 오면서 또다시 친구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또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일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일이 존재합니다. 그 할머니가 정말 당장 점심 값이 부족했는지 아닌지 어차피 나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속았을 수도, 속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내가 땅콩 한 봉지를 샀는데 집에 와서 먹어보니 맛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속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가 땅콩을 샀던 이유는 할머니의 말을 백 퍼센트 신뢰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점심을 못 먹게 되었다고 호소할 때 그걸 못 본 척하는 사람만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행위를 하는 나 자신입니다. 나의 행동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결정해주니까요.

결국 행동하는 사람들, 몇 번이고 모금을 진행하고, 세 걸음마다 땅에 엎드리며 행진하고, 주말마다 광장에 나와 소리 높이는 그 모든 사람들은 사실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행동이 과연 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아니 어떤 결과를 가져오기는 할 것인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그 행동을 하는 자신의 마음만은 알고 있으니까요. 침묵하고 방관하는 자기 자신을 견딜 수 없으니까요. 세상이 초라하다고 함께 초라해지고 싶지 않으니까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고 싶기 때문에 이들은 기꺼이 속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시혜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거울이야말로 이기적 인간이 사회를 가꾸고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바쁘고 지쳐서 세상일에는 관심 가질 수 없다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어차피 변하는 것은 없다고 빈정거리는 사람도요. 나 또한 바쁘고 지칠 때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관심 가질 수 없어도, 자기 자신에게만은 관심을 놓지 않았으면 합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지는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선의니 희망이니 전부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거울 속의 작은 반짝임은 거짓말이 아닐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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