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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호/사무사] 그대를 환영합니다

편집장l승인2019.04.01l수정2019.04.01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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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교사의 책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와의 관계에서 교사의 책임은, ‘세계 내’ 모든 성인 거주자의 대표로서 아이들에게 세계에 관한 세부사항을 알려주면서 ‘이것이 우리의 세계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 풍경이 있습니다. 말간 눈과 맨발만을 가지고 이 세계에 막 도착한 어린이와, 그 앞에 ‘어른 대표’라는 초라한 이름표를 달고 서 있는 나의 모습. “안녕, 잘 왔어. 여기가 우리의 세계야. 내가 여기에 대해 알려줄게.”라고 말해야 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등 뒤에 펼쳐진 세계가, 어린이에게 너무 잔인하고 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들어올 수 없어’라고 적혀 있는 식당 문에 대해 어린이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숱하게 듣게 될 ‘너는 어려서 몰라.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해’라는 말을, 그래서 어른들의 말을 잘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느 봄날에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된 아이들의 이야기를, 세계에 존재하는 눈물과 폭력과 혐오를, ‘어른 대표’인 교사는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요? 과연 내가 어린이에게 “여기가 우리의 세계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김혜진의 장편동화 ‘아무도 모르는 색깔’에서, 열두 살 아진이는 엄마의 장례식 날 울음을 참으며 병원 도서관으로 몰래 숨어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을 발견하지요. 새로운 세계의 이름은 ‘완전한 세계’. 그곳에서는 아진이가 사는 세계를 ‘불완전한 세계’라고 부릅니다. 완전한 세계에서 아진이는 슬픔도 두려움도 모두 잊고 색색의 모험에 뛰어듭니다. 타오르는 색, 가라앉는 색, 흐르는 색, 불어오는 색을 찾으며 아진이는 완전한 세계의 아름다움과 예측 가능성에 점점 매료됩니다. 이곳에서는 슬퍼할 필요도, 성장할 필요도 전혀 없지요.

하지만 아진이는 결국 불완전한 세계로 돌아옵니다. 슬픔과 두려움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가능성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모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프고 끔찍한 세계로 돌아온 아진이는 그 모든 불완전함을 품에 안고, 슬픔 이후의 삶을 씩씩하게 걸어 나갑니다.

슬픔과 희망이 뒤섞여 반짝이는 눈빛으로 돌아온 아진이와, 그 앞에 선 나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엉망진창으로 불완전한 세계에 첫 발을 내딛는 그에게 어른으로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결국 최선을 다해 환대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에게만큼은 늘 선의를 베풀려고 노력하기. 떠들거나 돌아다니는 것 같은 어린이의 자연스러운 특징을 비난하고 책망하지 않기. 어린이의 눈을 맞추고 다정하게 이야기하기. 또 어린이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기. 그리하여 어린이를, 추상적인 ‘미래의 희망’이 아닌 환영받고 존중받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대하기. 눈과 귀를 막고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려고 드는 것은 직무유기일 것입니다. ‘어른들이 미안해!’라며 아무 의미 없는 눈물을 흘리는 것은 기만이겠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인식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른 대표라는 이름표는 여전히 부끄럽지만, 부끄럽다는 이유로 해야 할 말을 건너뛰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연습합니다. “안녕, 잘 왔어. 여기가 우리의 불완전한 세계야. 이런 곳이라서 미안해. 그래도 너를 진심으로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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