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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호/영화도서관] <15시 17분 파리행 열차>를 보고

현정우l승인2019.02.18l수정2019.05.1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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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건 아닌가 싶다. 북미에서 작년 2월에 처음 공개된 영화를 본 시기도 늦었지만 그 감상을 적는 시기도 늦은 것 같다.
이 영화를 보고 한 달 뒤쯤에 <메리 셸리 :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이라는 영화가 개봉해 보게 되었다. 짐작보다 빠른 영화였다. 말을 주고받느라 쉴 새 없이 좌우 이동을 반복하기도 하고, ‘프랑켄슈타인’을 창작하는 결정적인 장면도 그 흐름 속에서 등장했다. 극장을 나오면서 이 빠른 ‘속도’의 영화가 들려주려 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을지 고민했다. 같이 영화를 보았던 엄마는 등장인물들이 갖고 있는 사연과 메리의 소설이 주변인들로부터 불러온 반응에 주목했다. 나는 메리가 소설을 쓰는 장면이 영화가 장착한 흐름에서 툭 튀어나와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떤 상승이나 하강도 아니고 그저 시간에 기댄 장치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의 인상에 불과했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면서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전기 영화라는 형식에 관심이 들었다. 실존 인물의 삶을 다룬 영화라는 말로 얘기하기엔 이미 넓어진 것 같고 전기 영화를 보거나 만들 때, 구체화해야 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실존 인물이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의 자격을 갖는 건 어떤 기준에서 이루어지고 받아들여지는지 궁금했다. 그 기준이 영화 내에서 갖는 지위도 포함해서 말이다. 
<15시 17분 파리행 열차>는 영화 전체가 암시를 넘어 예측처럼 작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초반에 나오는 정보들도 이 영화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려줄뿐더러, 시간이 흐르면서 갑작스레 삽입되는 화면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런 점들은 다른 (전기) 영화도 평범하게 사용하는 방식들이다. 그러나 <15시 17분 파리행 열차>에서 느낀 건 조금 다른 것이었다. 스펜서와 앤서니가 친분을 맺는 과정에서 하나 둘 꺼내어지는 총기들,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받는 제2차 세계대전 기록물, 모형을 이용한 지혈 훈련의 가짜 혈흔 등을 볼 때마다 불안한 기운이 전달되는 게 느껴졌다. 사물이 주는 심상을 잡았던 게 아니라, 지금 보이는 일이 어떤 식으로든 결국 다시 보일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던 것 같다.
예언자의 태도보다는 보는 사람이 접합을 의식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이 불편함이 보는 사람의 몫임을 어필하는 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15시 17분 파리행 열차>는 훌륭한 전기 영화다. 전기 영화를 만족시키기 위한 공정 작업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 인물을, 그것도 아직 살아있는 인물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영화는 진술에 기초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주인공들의 생애에 관한 인터뷰가 있었을 것이며, 그 전문을 편집하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일련의 작업에 걸친 의식이, 3인방을 주인공으로 만든 사건을 염두에 둔 채 진행되었을 것이란 사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주인공의 어린 시절 진술보다 사건 전후와 관계된 진술들에 더 긴 시간이 할애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영웅을 영웅화하기 위해 필요했던 사건이 내외로 큰 비중을 포착했음이 명확히 보이는 셈이다. 먼저 주인공들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낼 때 (어떤 방식으로든) 사건에 닿게끔 이야기를 끌어왔어야만 했을 것이다. 머나먼 기억들도 마찬가지이다. 마치 형사사건에서 알리바이를 거꾸로 탐색해나가는 과정과도 같다. 그러나 이 매끄러운 영화는 -자신의 재질을 증명이라도 하듯- 일관된 진술 내에 간헐적으로 폭력의 잔해를 삽입한다. 그리고 뒤에 이르러서야 이 엇갈림이 이미 극초반에 주도되었음을 깨닫게 한다. 진술을 방해하는, 진술에서 위조된 사물로만 지시되었던 요소들이 다른 용도에(사람을 죽인다던가) 쓰이는 걸 본 순간 당혹감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너무나 쉽게 우리는 그게 뒤에 일어날 중요한 일임을 암시하는 거라 생각하고 만다.

<그림 1>

자기 자신과 영화를 소개하는 주인공 앤서니 새들러의 내레이션 직후 적합한 흐름을 유지하던 영화 사이사이에 파리행 열차 테러 사건의 기억을 삽입하는 식으로 영화가 공정을 주도했음을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회상 또는 암시를 유도하는 전기 영화의 경우가 이 영화뿐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를 부분 부분으로 구성된 전체로 생각할 때 <그림1>과 같은 도식을 떠올릴 수 있다. 주인공이 생애 전반을 처음부터 이야기하는 시간대와 달리 갑작스레 삽입된 장면의 위치는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도식이 시간대의 모양새보단 경위서의 그것에 가까움을 알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마지막에 이르러서 삽입된 잔재들은 같은 방향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달리고 있던 공간으로 편입된다. 이 공간의 이름은 ‘열차’다. 그러나 영화는 잔해를 수습하는 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앞선 잔재들은 그저 사건의 명확함을 재차 확인시켜줄 뿐이다. 사실 여기에 관해선 말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3인방의 영웅담이 열차 내부를 가득 메운다. 그 뒤의 이야기, 3인방이 프랑스에서 공로 훈장을 받는 장면에 다다르자 영화는 이제 실제 보도 화면과 영화 화면을 뒤섞기에 이른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도 이 부분이었다. 열차 내부에서 범인을 제압하고, 피를 흘리는 승객을 지혈하는 장면을 오랫동안 잡는 것이 가슴에 깊이 남았다. 아마 영화를 보기 전이었다면 그 때 들었던 느낌이 뭉클함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이 장면에서 스펜서는, 목피가 쏟아지는 목구멍을 간신히 눌러 쥔 채 마크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다. 깨어있어야 한다면서 계속해서 말을 거는 와중에 스펜서는 그에게 기도를 하고 싶으냐고 물어본다. 이 상황은 묘하게 영화 앞부분의 지혈 훈련 장면에서, 목의 지혈이 심할 때는 어떻게 하냐는 스펜서에게 교관이 그럴 땐 그저 기도하라고 응수하는 상황과 닿는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중간 갑작스레 삽입된 장면에서, “스펜서, 가!”라는 대사는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정황이 드러나는 열차 내부 제압 장면에서 이 대사가 다시 등장하면 그제야 듣는 이는 이 대사의 쓰임새를 알아차리게 된다. 심증으로만 미뤄졌던 일들이 직접 이루어진다고 그것이 어떤 만족도, 성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15시 17분 파리행 열차>가 건드리는 지점이 바로 그 지나칠 정도로 단순화된 ‘닿음’에 있다고 생각이 될 때 쯤, 영화는 자료 화면과 영화 화면 사이의 접촉을 더욱더 가까이 완성시킨다. 어떤 면에선 당혹스럽고, 또 어떤 면에선 안정적이고, 어떤 면에선 불균질에 가까워 보이는 순간이다.
이 영화가 잘 만든 영화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 말할 것도 없다. 동시에 이 영화가 영웅을 만드는 요소를 어떻게 이용했는지 연구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15시 17분 파리행 열차>는 실제라는 관계를 이용한다. 조그맣게 삽입된 장면과 그 너머의 영웅담이 다른 것이라 구분 짓게 만든 기준이 후반부로 갈수록 교란을 거듭한다. ‘구분할 수 없음’이라는 지대에서 서사를 짓고 허무는 것은 누구의 역할인가? 전기 영화를 홍보할 때 관객에게 가장 큰 감흥을 유도하는 부분이 ‘실제 있었던 일’임을 어필한다는 점에서 <15시 17분 파리행 열차>의 지대는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가?
여기에 실제 영웅담의 주인공들이 직접 연기를 펼치는 등 현장에서 치러진 노력들의 영향 또한 있음이 사실이다. 근 다섯 편의 영화에서 내리 이스트우드는 실제 이야기를 토대로 영화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영화(속 주인공)들은 늘 어딘가로 비껴있었다. 두 달 뒤 개봉 예정에 있는 <라스트 미션>이 기대될 따름이다. 


현정우  kubrick45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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