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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호/기획] 학생, 시대에 맞서다

글 : 김범수 기자 / 편집 : 정화정 기자l승인2018.11.12l수정2018.11.1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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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 국가보훈처 행사가 됨으로써 정부행사로 격상되었다. 정부는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발전시켜 소명의식을 고취하고,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알리고자 11월 3일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지정했다. '학생이 지켜온 정의, 그 위대한 역사의 시작'이란 주제로 진행된 제89주년 학생독립운동 기념식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89년 전 오늘, 나주에서 촉발돼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은 청년항일투쟁사에서 특기할 사건이었다."며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가치를 평가했다. 학생들이 시대에 맞서 싸우는 투쟁의 역사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가치를 찾아낸 것이었다. 이번 기획에서는 광주학생항일운동, 2.8독립선언, 4.19혁명, 6월민주항쟁등 투쟁의 역사로 대변되는 우리 민족의 굵직한 현대사를 따라가며 학생운동의 역사와 가치를 되짚어보려고 한다.

▲ 1919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재일본 유학생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 2·8독립선언

1910년 경술국치이후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에 대해 논하고 있었으며, 동경유학생들은 계몽운동, 애국사상전파등을 통해 독립운동에 기여하고자하였다. 특히 조선유학생 향우회는 동경유학생이라면 자동적으로 가입되는 단체로, 웅변·토론활동을 비롯하여 회지 <학지광>등을 발간하며 애국사상전파에 힘을 썼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한 민족이 그들 국가의 독립 문제를 스스로 결정짓게 하자는 원칙)가 널리 퍼지면서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고, 재일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동경 간다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회를 열어 “오늘의 정세는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며, 해외의 동포들도 이미 실행운동에 착수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마땅히 구체적 운동을 개시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이후 일본정부, 각국대사등에 전달하기로 결의하고, 2월 8일 오전에 각국대사관, 조선총독부등에 선언문을 전달한다. 오후 2시에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회의를 열고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발표 현장에서 일본경찰은 발표자 백관수를 비롯한 10명의 학생들을 기소하고, 독립선언회의를 해산시킨다. 일제의 행동을 강한 어조로 비판한 2.8독립선언서는 학생들이 일제의 행동에 대해 규탄하고 민족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으며, 3.1만세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1920년대 중반 전라남도 광주에서 조직된 항일 학생비밀결사 성진회 회원들 출처 / 국가보훈처

2. 광주학생항일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고보)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 학생들의 충돌이 계기가 되었다. 광주중학 3학년 후쿠다 슈조일행이 광주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을 희롱하면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등과 싸움이 붙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경찰은 광주고보생들에게 일방적인 책임을 물었고, 11월 3일 일본의 국경일이자 일왕의 생일인 명치절(현재 문화의 날)을 기해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시내, 광주역등에서 시위를 벌였다. 11일에는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등의 학교가 참여하며 시위가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의 자유 보장,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민족 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보장 등 9개 항목을 주장하며 시위를 진행하였다. 신간회는 진상위원단을 광주로 파견해 진상조사를 실시하고 지원해주는 한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학생전위동맹 등은 광주학생항일운동 소식을 서울의 학교들에게 전달하며 격문을 배부했고, 서울의 여러 학교들의 동맹휴학과 12월 9일부터 13일까지의 대규모 시위를 이끌어냈다. 일제는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강제전학 298명, 1,600명의 학생들을 검거했고, 광주사범학교를 폐교하기에 이른다. 이후 이듬해 3월까지 서울, 개성, 부산, 진주, 청주, 대전, 전주, 정읍, 평양, 신의주, 대구, 춘천 등에서 동맹휴교나 시위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학생들의 시위가 세대를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대된 시위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또한 3.1운동이후 다양해지는 민족독립운동의 계층에서 학생들이 참여해나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시위이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1930년대에 대중운동 발달이 원활하게 이루어졌고 한층 발전할 수 있었다. 

▲ 4·19혁명 당시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말라'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하는 중학생들출처 / 한겨레

3. 4·19혁명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례, 이승만 정권은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등 부정적인 방법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60년 2월 28일(당시 일요일)에는 제4대 정·부통령선거의 부통령 후보 장면의 대구 수성천변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학교가 일요등교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학생들이 등교거부를 선언하고 경북도청과 대구시청, 자유당 경북도당사, 경북도지사 관사 등을 돌며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는 2.28민주운동이 일어났다.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의 불법선거활동을 행하자, 당일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정부는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했으며, 4월 11일 마산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고등학생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에서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국회의사당까지 이동하였다. 하지만 학교로 돌아가던 도중 반공청년단에게 습격을 받았다. 4월 19일 학생들은 서울 각지의 대학교에서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총궐기를 진행했고 경무대로 진출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무력진압을 시도하였고, 당일 오후3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약 100명을 사망자와 450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그럼에도 퇴진의사를 밝히지 않자 4월 25일 서울 각 대학 교수들은 이승만 퇴진요구를 내용으로 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4월 26일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고,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2.28민주운동과 4.19혁명은 학생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헌정사상 최초로 대통령을 하야시킨 시위로, 대한민국 민주시위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고, 6월 민주항쟁이 확산될 당시 이한열학생을 추모하며 시위한 시민들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 6월 민주항쟁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 정통성과 도덕성, 정당성 등에서 큰 의구심을 안겨주었다. 전두환 정권기간동안 시민들의 민주화의 열망은 높아졌고, 다양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들이 이어졌다.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박종철학생이 과도한 고문으로 인한 질식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정부는 일관되지 않은 태도로 발표를 번복했으며, 전국적으로 박종철에 대한 추모물결과 정부에 대한 비난, 직선제 개헌시위에 대한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4월 13일 개헌논의를 유보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통해 국민들의 요구와 반대되는 행동을 했다. 6월 9일 연세대학교가 연세인결의대회를 열고 시위를 하는 과정에서, 이한열 학생이 시위도중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중태에 빠졌다. 시민들은 정부의 무자비한 진압과정에 분노했으며, 6월 10일 국민대회에서 전국각지에서 24만 명의 시민들이 운집했다. 시위인원은 꾸준히 늘어나 6월 18일 최루탄 추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던 ‘최루탄 추방의 날’ 행사에서 전국 16개 도시 247곳에 150만 명이 참여함으로써 정점을 찍었다. 시국은 점점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아래 개헌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해갔고, 직선제 개헌의 내용을 담은 6.29선언을 발표함으로서 종료되었다. 6월 민주항쟁은 학생들의 시위가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켜 대한민국을 민주국가로서 한 층 발돋움시킨 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들 중 하나이다.

▲ 사진 / 김범수 기자

5. 학생독립운동기념일 정부행사로 격상

1953년 10월 20일 광주학생운동일인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하였다. 1973년 3월 20일에는 정부가주관하는 각종 기념일을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국가기념일에서 폐지하였다. 1984년 9월 22일 ‘학생의 날’이 국가 기념일로 부활했고 2006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8년 11월에는 교육부 주관에서 국가보훈처·교육부 공동주관으로의 변경이 이뤄지면서 정부행사로 격상되었다. 실제로 올해 11월 3일 ‘학생이 지켜 온 정의, 그 위대한 역사의 시작’을 주제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제89주년 학생독립운동 기념식을 진행했다. 이날 독립유공자 포상, 기념사, 기념공연등이 이어졌으며, 이낙연 국무총리는 "89년 전 오늘, 나주에서 촉발돼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은 청년항일투쟁사에서 특기할 사건이었다."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현대사의 큰 역사로 평가하는 한편, “내년에 90주년을 맞는 학생독립운동 기념식은 남과 북이 함께 민족적 행사로 준비하겠다. 며 학생독립운동 기념식을 확대하고자 하는 의지를 밝혔다.

 


글 : 김범수 기자 / 편집 : 정화정 기자  qjatn16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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