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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호/사무사] 총장님께 드리는 글

편집장l승인201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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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희찬 총장님,
저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대학본부 앞. 9월 13일, 10월 11일, 10월 12일, 10월 19일, 10월 22일. 학생들이 L교수의 파면을 촉구하기 위해 나온 그곳에 저는 있었습니다.
저는 보았습니다. 여섯 명, 스무 명, 서른 명, 아흔 명, 백이십 명. 집회를 거듭할수록 늘어나던 얼굴들을, 진지하게 굳은 표정들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침묵하지 않겠다, 학생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피켓에 손으로 꾹꾹 눌러 쓴 글자들을 보았습니다. 자유발언을 하기 위해 확성기를 들고 선 학생들이,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흘째 단식 중이던 총학생회장이 흐느끼다가 부축을 받으며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윽고 하나둘씩 조용히 눈물로 젖어가던 얼굴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들었습니다. L교수를 파면하라, 전수조사 실시하라, 학생들과 소통하라, 교원대는 책임 져라. 수십 번 수백 번 외쳐 부르던 구호, 너무 많이 외쳐서 금방 외워 버린 구호를 또 한 번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구호를 외치던 목소리 끝이 이따금 갈라지는 것을 들었습니다. 갈라진 목소리 속의 분노를, 슬픔을, 막막함을, 간절함을 들었습니다.

여쭙고 싶습니다.
총장님께서는, 그곳에 계셨습니까. 그들을 보셨습니까. 그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학생들은 수차례 총장님과의 면담을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했습니다. 학내 구성원 1273명이 참여한 서명운동 결과도 전달드릴 수 없었습니다. 학생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징계 과정은 공개되지 않았고, 성문제대책위원회가 요청한 성문제 관련 전수조사는 언제 어떻게 진행되는지, 진행은 되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습니다. 스무 명 남짓에 그치던 집회 참석 인원이 100여 명으로 늘어도, 총학생회장이 무기한 단식을 선언해도, 총장님과 대학본부는 고요하기만 했습니다. 마치 학생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한 고요. 그 굳건한 침묵 앞에서 학생들은 배제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2018년 신년사에서 “올해에도 저 자신부터 초심을 잊지 않고 구성원들과의 소통을 강화하면서 가능한 많은 구성원들을 만나 의견을 듣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던 총장님은 어디에 계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징계위원회의 L교수 파면 결정에 부쳐, 총장님께서는 “이번 결정을 계기로 우리 학교가 다시는 외부의 눈총을 받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부의 눈총이라는 말을 한참 되뇌어 보았습니다. 눈총이란 눈에 독기를 띠며 쏘아보는 시선을 말합니다. 외부의 ‘시선’에는 그토록 예민하시어 간절히 기도까지 하시는 총장님께서 내부의 눈물, 내부의 외침, 내부의 행동에는 그만큼 적극적이지 않으셨다는 사실이 저는 화가 난다기보다는 참 슬펐습니다.
학생들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학내의 많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학생은 자주 소외됩니다. 학생의 의견은 무시당하기 쉽고, 학생의 목소리는 더 크고 중요하다는 이야기에 묻혀서 사라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대학은 힘없는 자들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학내 구성원들이 학교의 주요 사안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는 데 거리낌이 없고, 그 의견이 묵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최소한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을 때 대학은 진정한 배움의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 학내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체화한 학생만이, 후에 교단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민주주의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총장님,
우리 대학은 막 변화의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L교수의 파면 결정이 그것입니다. 다음 발걸음은, 총장님과 학생들, 그리고 모든 학내 구성원이 함께 내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성문제 관련 전수조사를 실시해주시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주십시오. 성문제 관련한 징계위원회에 학생 대표와 젠더 전문가, 여성위원의 50% 이상 참여를 보장해주십시오. 학내 성폭력 상담 및 신고시스템을 내실화·활성화시켜주십시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주시고, 진행 과정을 구성원에게 공유해주십시오. 위계에 의한 성범죄에서 자유로운 학교를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주십시오.
모든 조직은 갈등과 문제를 통해 발전합니다.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입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 학교는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총장님과 학교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학교, 아무도 울지 않는 학교, 모두의 목소리가 귀하게 여겨지는 학교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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