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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호/독자의 시선] 로렌스 애니웨이

김경지(미술교육·14)l승인2018.10.29l수정2018.10.2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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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렌스 애니웨이>는 긴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사로잡는 영상미, 다양한 비유와 상징, 독특한 전개 방식과 스토리 라인을 통해 관람객을 몰입시킨다. 영화는 로렌스라는 한 인간의 정체성과 사랑, 곧 그(녀)의 삶을 담고 있다. 

<물 밖의 머리>
35번째 생일을 맞은 로렌스. 그의 머리는 투명하고 좁은 유리잔 물속에 굴절된 채 잠겼다. 그는 지금 힘겹게 숨을 참고 있다. 어릴 적 삼촌 댁에서 하던 잠수놀이보다 더 힘겨운 숨 참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마침내 그는 죽을 것 같다는 비명 혹은 절규로 울부짖는다. 물속에서 수면 위로 떠오를 때 잔뜩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동차 세차기의 힘찬 물줄기가 줄어들고 몇 가닥 물줄기만 뚝뚝 흐른다. 드디어 그는 잠재된 자신의 자아를 폭발적으로 선택한다. 
그러나 이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토록 자신의 정체성을 내보이지 않은 것은 비단 그의 성격 탓이 아니다. 사방에서 죄어오는 수압처럼 몰려드는 시선들. 시선의 압박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가 ‘육체’라는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숨을 옥죄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그(녀)가 살아남는 방법은, 그것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뒤샹과 로렌스, 에로스 셀라비와 로렌스, Mutt사와 Allia사
프레드에게 커밍아웃 후, 그들은 서로의 등에 서약을 적는다. 침대 머리맡 벽에는 르네상스 때 절정에 달했던 ‘이성적인 규칙과 기법’으로 완성된 걸작 <모나리자>의 복제 그림에 ‘자유’를 새긴다. 로렌스가 다 빈치의 <모나리자> 포스터에 낙서를 휘갈긴 장면에서 20세기의 예술가 마르셀 뒤샹을 떠오른다. 뒤샹은 작가의 ‘선택 행위’를 통해 일상 사물을 예술 작품으로 만든 작가이기 때문이다. 뒤샹은 모나리자가 그려진 엽서에 콧수염을 그려 넣고 ‘L.H.O.O.Q.’를 적었다. 이를 불어로 음독하자면 “Elle a chaud au cul. 그녀의 엉덩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로렌스의 내면에도 뜨겁게 불타오르는 정체성이 떠오른다.
마르셀 뒤샹과 로렌스가 오버랩 되는 것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만 레이가 찍어준 뒤샹의 초상사진이다. 뒤샹은 여장을 하고 만 레이의 카메라 앞에 섰으며, ‘Rose Se′lavy’라는 서명을 남겼다. 뒤샹은 자신의 성별마저 선택을 통해 바꾼 것이다. 몇 년 뒤 아예 로즈 셀라비라는 이름에 R을 한 번 더 넣어 Rrose Se′lavy로 표기한다. ‘R’은 불어 발음이 ‘에흐’라서, 불어로 음독하게 된다면 그 이름은 “사랑, 그것이 곧 삶이다”(Eros, c’est la vie)을 의미한다.  
뒤샹은 여성 에로스 셀라비를 얼터 에고로 내세우기 이전에 이미 ‘레디메이드’를 선보임으로써 작가의 ‘선택’ 행위 자체가 예술임을 선보인 바 있다. 그 유명한 <샘>이 그의 첫 레디메이드 작품이다. <샘>은 뒤샹이 머트(Mutt) 회사에서 제작된 수많은 남성용 변기 중 하나를 선택하고 ‘R. Mutt’라는 사인만 적어 출품한 작품이다. 뒤샹은 ‘변기’라는 일상의 대량생산품을 ‘선택’이라는 행위를 통해 작품의 반열로 올려놓았고, 에로스 셀라비 분장을 통해 성(性)과 성(姓)을 모두 ‘선택(혹은 변경)’했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통해 사회적·육체적 남성이 아닌 ‘여성’이길 선택한 로렌스와 뒤샹의 <샘>이 무슨 관계이느냐 묻는다면, 그것은 로렌스의 이름에 해답이 있다. 로렌스의 풀네임인 ‘로렌스 알리아(Laurence Alia)’의 ‘알리아’는 변기를 만드는 회사 ALLIA와도 같은 발음이다. 프레드와의 첫 만남에서 로렌스의 풀 네임을 듣고 “로렌스...뭐라구요?”라고 반문하는 장면은 단순히 프레드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다. 그의 이름이 변기 회사 이름과 같아서 약간 웃으며 되묻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여하간 자신은 로렌스예요. 라며 가볍게, 아니 묵직하게 자신을 어필한 그는 머지않아 당당하게, 그러나 힘겹게 자기 정체성을 선택한다.

난무하는 정상과 비정상, ‘특별함’이 존재할 자리는 어디에 있나
당당히 ‘여성’의 모습으로 교실에 나타난 로렌스. 비난과 야유보다 무서운, 알 수 없는 시선보다 무서운 침묵. 그는 어쩌면 개울 수면 아래에서 숨을 참았을 때보다 더 숨막혀 보인다. 
교실의 벽면에는 사진 여럿이 붙어있다. 피타고라스, 마르크스와 앵겔스, 루소, 칸트, 데카르트, 에피카르모스에 이어 소크라테스까지, 서구 역사를 이끌어온 지성(知性)과 이성 아래 선 로렌스는 죄 없이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모습이다. 서양사는 지독하리만치 지상과 천국, 선과 악, 천국과 지옥 등 이분법에 익숙해져 ‘정상과 비정상’이 난무한다. 모더니즘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생을 좌지우지하는 무서운 양팔저울처럼 보인다. 로렌스는 반드시 어느 ‘정상’ 혹은 ‘비정상’이라는 접시 위에 올라서야만 하는가? 
어색한 정적 속에서 자신의 여장을 심판받기 위해 침묵을 지키는 교실의 구성원. 이 때 침묵을 깨는 질문이 들어온다.
“8페이지 3번째 단락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이 부실해서요.”
언제부터? 왜? 무슨 일로?와 같이 그(녀)의 ‘여장’에 대한 질문이 아닌 것이다. 이로써 로렌스는 양팔저울이 아닌, 즐겁게 즐기는 시소에 올라 탄 것만 같은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전율에 맞춰 복도를 울리는 힘찬 구두소리. 이 또각거림은 그(녀)가 ‘거대한 자아’로 설명한 노란색 구두이기에 더욱 큰 소리로 울려 퍼진다.  

왕관을 쓴 드랙 퀸. 그리고 그(녀)의 몽타주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겼다. 태초의 신이 세상을 만들어 비추는 대목이자, 로렌스가 프레드에게 전등을 선물하러 조명가게에 갔을 때의 대목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는 신이 될 수 없었다. 학교 이사회의 권고사직에 그는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라는 말을 남기고, 그 문구의 주인공(예수)처럼 스스로의 가시밭 고행 길을 걷기 시작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만끽하며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어느 날, 그의 정체성은 스스로에게 가시 면류관이 되어 돌아왔으며, 그는 이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만 한다. 설상가상으로 그에게 시비를 거는 남성에게 폭력을 휘둘러 싸움이 났고, 그는 정말로 가시관을 쓰고 채찍을 맞아 망신창이가 된 꼴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런 로렌스는 포기하지 않고 ‘한 사람’을 찾는다. 그(녀)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버림받은 적 없고, 소외되더라도 따지지 않는 사람, 평범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찾는다.
과연 그(녀)의 몽타주와 일치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인간은 저마다 각자의 언어를 사용하며, 나름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타인에 의한 소외에 굴복이든 극복이든 어떠한 제스처를 취하며 나름의 에고이즘을 가진 채 살아간다. 세간의 이목 속에서 ‘평범함’을 영위할 수 없는 로렌스가 찾는 몽타주는 ‘모든 평범한 존재들의 특별함’을 역설적으로 제시한다. 

질병을 특수성으로, 특수성을 특별함으로, 그리고 그 특별함이 곧 평범함으로 여겨지기 위해 수많은 정체성은 역사 속에서 오랜 시간 어두운 길을 걸어왔다. 모더니즘의 상징인 ‘이성과 합리주의’는 이분법적 사고를 놓지 못했으며, 이는 겨우 현대에 이르러서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다원성을 탐구하는 수준일 뿐이다. 현대의 이 순간조차 여전히 ‘모두의 평범함’이라는 블랙 아일랜드에 안착하진 못했다. 
많고 많은 정체성을 지칭하는 용어들 속에 ‘주체’ 혹은 ‘자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알로로맨틱, 에이로맨틱, 레즈비언, 게이, 드랙 퀸 등. 무수히 많은 이름들의 페르소나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가?


김경지(미술교육·14)  knue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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