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18.11.8 목 01:15

[421호/영화도서관] 우물 밖의 방랑자

현정우l승인2018.10.29l수정2018.10.29 13:28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 <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 후>, <풀잎들>, <클레어의 카메라> 중 (출처 / imdb, 아트하우스 모모)

내가 말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정말 진심을 다해서 말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만 해서 무척 답답하고 억울할 때가 있을 것이다. 나도 답답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말이란 건 그렇게 나오질 않는 모양이다. 가끔은 내 목소리를 내가 직접 들을 수만이라도 있었으면 싶기도 하다. 동영상을 통해서 듣는 목소리랑 내가 말할 때 듣는 목소리는 확연히 다르다. 상대방이 듣는 나의 목소리를 알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얘기할 때 내 목소리를 통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을 앞둔 저 사람은 이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자살하고 없는 친구의 곁에서 소리를 높이는 남녀를 보며 아름은 나지막하게 독백한다. 기주봉이 연기했던 창수는 자살을 했을 땐 술을 잘 안 먹었다며 고백한다. 표면에 죽음이 삽입되는 순간 당혹감을 느끼는 건 영화 속 인물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죽음을 다룬 작품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같은 해에 보았던 장윤미의 신작 <공사의 희로애락>은 건설 현장 노동자로 수십 년을 살아 은 부친의 모습을 찍는다. 구미와 서울을 오가며 운전대와 마을과 고층건물이 교차하는 풍경을 반복하던 카메라는 종국에 이르러 굿 가락과 함께 화면을 흩어뜨린다. 실제로 GV에서 찍고 싶은 대로, 손이 가는 대로 찍었다는 감독의 전언처럼, 영화도 자연스럽게 죽음이 가까워 온 부친의 시간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랑의 노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에 나오듯 ‘말과 말 사이의 흥겨움’을 배제하는 것이 홍상수 영화의 궤적이라 느껴 왔다. 술자리에서 반복되는 이야깃거리들이 결코 안주거리가 아니며 근원과 발화 절차가 분명한 말임을,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말을 하는 한 명의 수면으로 패닝/줌 인을 반복하는 운동 자체만으로도 그의 영화는 헤아리기 힘든 벡터들의 총체처럼 이끌려 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소음, 폭발하는 감정, 거울과 뒷모습이 운동의 헤게모니에 뚜렷이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마지막 장면, 해변 앞에서 떠도는 유령의 모습들이 누군가의 꿈처럼 보였던 건 이 탓이었을까.
아쉽게도 나는 아직 <그 후>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 개봉했던 홍상수의 두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와 <풀잎들>이 각자 낮은 채도와 노이즈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다가왔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 카메라를 들고 찾아온 클레어는 카메라로 대상을 찍는다는 행위가 변화를 일으킴을 믿고 있었다. 그 믿음에 응답하듯 영화도 몇 번이고 정면과 측면을 오간다. <풀잎들>이 시공간을 몇 번이고 넘나들 수 있게 해 주던, 카페의 고객이면서 동시에 대화에 끼지 않는 대상이었던 아름이 골목길을 나서고 공간을 빠져나가자 고이고 선회하던 풍경들이 비로소 풍경으로써의 자격을 얻어 간다.
정희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부는 질문하는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혹은 공부하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선생님에게 물어 도움을 요청하는 노동이다. 이 외의 모든 질문은 권력     행위이다.” 두 편의 영화에서 감독-역할-을 연기하던 정진영의 모습 뒤로 아름이 합석한 테이블이 몹시 찬란해 보인다. 어깨 너머로 얼굴을 찍었던 장면에서 홍상수는 뒷모습과 그림자마저 대화의 요소로 편입시킨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속 거울 뒤로 보이던 술자리가 소음이 차단된 방어막으로 꽁꽁 얼어붙은 장소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영문을 모를 말들을 걸고 자기만 생각하는 질문을 자꾸 내뱉는, 어쩌면 감독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주체가 프레임에서 사라짐에 따라 비로소 활기를 얻는 테이블의 모습은 쉴 새 없이 계단을 뜀박질하는 김새벽의 행위만큼이나 영화를 나아가게 만든다.
주저하는 마음, 숨겨진 의도, 비밀과 거짓말은 보이지 않고 그곳엔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게끔 만드는 공간만 있게 된다. 외부자의 시선은 필연적이다. 우리의 모습을 겉에서 바라보는 방랑자를, 지속될 의미를 찾는 삶에 침범하는 자살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던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도 몰랐던 지리멸렬한 우물을 보는 것은 때론 발견이 된다. 홍상수의 이 무섭도록 단순한 영화는 촬영하는 이의 속성이 함의된 화면마저 같은 표면으로 인식하게끔 만든다. 그 안에서 쉼 없이 들려오는 음악만이 영화를 보는 의미를 촉구하는 듯하다. 

 


현정우  kubrick456@naver.com
<저작권자 © 한국교원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현정우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처리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이전홈페이지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강내면 태성탑연로 250  |  대표전화: 043) 230-3340  |  Mail to: press@knue.ac.kr
발행인: 류희찬  |  주간: 손정주  |  편집국장: 박설희  |  편집실장: 김지연/김보임/허주리  |  청소년보호책임자: 박설희
Copyright © 2018 한국교원대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