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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호] 보도사진 강좌를 듣고

김택 기자l승인2012.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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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심리를 반영하여 추상화와 왜곡을 거치는 미술과는 달리, 사진은 렌즈를
통과한 빛을 반영하여 이미지 센서에 찍고자 하는 대상을 그대로 그려낸다. 그렇기에 사진은 찍고자 하는 대상 그 자체를 나타내어 사실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만 같다. 이 때문인지, 사진에 사진가의 주관은 개입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과정에도 사진가의 주관이라는 필터링을 거치기 마련이다. 특히 보도사진의 경우에는 신문 독자의 해석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고자 하는 사진가의 주관이 사진의 구석구석 담겨있다.
보도사진으로 평범한 평면구도 사진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 사진가는 광각렌즈,
어안렌즈와 같은 여러 가지 렌즈를 쓰고, 클로즈업을 비롯한 갖가지 기법을 통해 대상을 부각시키고, 설명의 효과를 높인다. 구태여 이러한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단순히 사진을 찍는 거리와 각도를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사진가가 넣고자 하는 효과가 충분히 담길 수 있다. 이러한 효과는 보도사진을 본 독자가 사진을 특정 방향으로 해석하도록 이끈다. 결국 보도사진은 독자에게 특정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사진가의 주관의 산물이다. 또한, 애초에 대상을 감싸고 있는 수많은 팩트 가운데 어떤 것을 찍을 것인지 선택하는 행위도 사진가의 주관의 몫이다.
글도 사진과 마찬가지다. 전체적으로 두드러지는 어조와 드문드문 눈에 띠는 기교,
문장의 끝자락에 미묘하게 느껴지는 뉘앙스 모두 글쓴이의 의중을 전달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누군가 쓴 글이 팩트 나열에 그친다 해도, 팩트를 나열한 순서와 수많은 팩트 가운데 몇 가지를 선택하여 글에 담는 행위까지도 독자의 해석을 글쓴이가 원하는 특정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 대본으로 전달하려는 팩트가 선별되어 있고, 편집 기법으로 시공간이 변형·왜곡되어 독자에게 특정 장면만 보여주는 영상매체도 주관을 피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다.
언론 매체를 구성하는 것은 글과 사진, 영상이다. 결국 어느 언론이건, 특정 방향
성을 전제로 한다. 어느 일개 시골 고등학교의 교지라도, 그 교지를 쓴 학생이 대상을 바라보는 세계관, 정치적 성향, 성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십여 년을 축적해온 경험, 그러한 주관적인 것이 각개의 기사마다 담겨 있다. 따라서, 언론의 객관성은 주관이 배제된 사실 그 자체만을 나열하여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는데서 찾을 수 없다. 주관을 배제할 수 없음은 이미 근대 역사학을 거쳐 불가능함이 밝혀졌다. 랑케와 액턴 등 숱한 역사학자들이 텍스트에서 자기 자신을 없앨 것을 부르짖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또한, 사실 그 자체만을 보도하고자 함은 기자 본인의 사유를 통하여 독자에게 진실을 알려야 할 책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사유 없는 글에는 글쓴이의 책임도, 힘도 없다. 때문에 언론인들이 말하는 언론의 객관성은 사실 그 자체의 나열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언론인은 사유해야 한다. 취재를 거쳐 사실을 수집하고 모은 사실들을 접고 쪼개고 엮어내어 진실을 구성한다. 그렇게, 자신의 사유를 통해 옳다고 결론 내린 진실을 보도한다. 그리고 그 진실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 그것을 현대인의 언론인이 좇아야 할 객관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혹자는 고대 소피스트와 같은 사유를 통해 인간의 사유를 부정하기도 한다.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이기도 하지만, 사회 없이는 인간도 없다. 늑대에게서 키워진 소녀가 늑대의 품에서 인간 사회로 나아간 이후에도, 인간의 문물을 이해하지 못하고 언어도 구사하지 못했다는 예는 위의 사실에 설득력을 실어준다. 따라서, 인간의 사유는 모두 사회 안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을 내려 볼 수도 있다. 실로, 인류의 역사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훑어보자면 그 시대의 수많은 인간들이 그 시대의 지배 담론에 편승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사유가 그 자신의 사유가 아니라 사회와 그 담론으로의 편승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소피스트적 사고는 사유의 결과인 인간 제도와 문화들을 해체 가능한 것으로 폄하한다.
사유에 대한 온갖 불신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의 사유를 믿을 수밖에
없다. 사유에 대한 불신은 인간 문화와 제도에 대한 불신으로, 나아가 윤리적 데카당스로 귀결된다. 스스로 인간임을 부정하는 동물적 행위로 팽배한 사회를 건전하고 올바르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인간의 사유는 인간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언론인은 그러한 기둥을 지탱하는 한 축이 되어야 한다. 비록 각자가 생각하는 진
실이 다르며, 다른 진실을 좇아가고 있지만 그러한 개별 인간 활동들이 부딪치고 뭉쳐져 결국은 이 사회를 단단히 지탱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택 기자  knuepres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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