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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호/영화도서관] <산책하는 침략자>를 거치며 : 구로사와 기요시 유령과 거울

현정우l승인201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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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카와 토모히로의 원작 <산책하는 침략자>는 구로사와 기요시에 의해 세 차례 각색되었는데, 2017년에 공개되었던 드라마 <예조 : 산책하는 침략자>와 드라마의 극장판, 그리고 같은 해에 제작 및 개봉된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가 그것이다. 원작을 비롯해 세 작품 모두 외계인이 지구 침략을 위해 인간의 몸에 들어와 인간에게 -언어가 아닌- 개념을 뺏어간다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한다.
일련의 ‘산책하는 침략자’ 묶음을 보면서 느꼈던 특색은 빛이었다. 빛은 외계인이 개념을 뺏기 위해 몸을 대는 접촉점을 광원으로 하여 일순간 후광의 형태로 점멸하는데, 기요시의 이전 영화인 <큐어>나 <복수 시리즈>의 혈흔처럼 픽션을 갖추는 데 사용된 소재를 떠올리게끔 강렬하게 사용된 특수효과였다. 외계인이 인간의 개념을 뺏는 방법은 아주 간단한데 상대방에게 해당 개념의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유도하여 상대방이 집중을 한 순간 검지로 이마를 한 번 톡 쳐주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거듭되어 발전을 거칠 경우 몸에 손을 대지 않고도 개념을 뺏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데 드라마와 영화가 경지에 다다른 외계인을 사용하는 방식 또한 다르다.
그러나 빛이 표준된 논리처럼 외계인이 손을 대는 순간마다 등장하지는 않는다. 개념을 뺏는 행위에는 차이가 없는 외형만으론 판별할 수 없는, 외계인만이 갖고 있는 개념에 대한 무지와 목적성이 전제된다. 외계인이 개념을 뺏는 행위는 얼마든지 눈에 보이며 행동으로써의 능력치를 가질 수 있지만 지구인들의 입장에서 그 의도와 전략은 보이지 않는 기이한 현상과 바이러스로 재정위될 뿐이다. 지구 침략을 설명하는 외계인 아마노를 믿지 못하는 사쿠라이 상의 모습처럼 신지가 나루미의 여동생에게서 ‘가족’을 뺏어갈 때와 나루미의 상사로부터 ‘일’을 뺏어가는 행위가 픽션 너머에 비치는 모습은 다르다. 나아가 외계인이 들어간 상태에서 지구인의 원래 인격이 사라지면서 주변 인물과 벌이는 해프닝이 갈등의 주요 골자로 발전된다. 지구인의 입장에서 외계인은 “일시적인 쇼크를 받은” 나의 OOO일 뿐이다.
외도를 하며 행방불명되었던 남편 신지가 길바닥에서 발견되자 나루미는 신지를 자기 집에 들여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 (이것이 법적인 문제 때문인지 금전적인 문제에서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미 외계인에게 의식을 점령당한 상태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갈팡질팡하는 신지를 나루미는 끝없이 주의시키고 조심시키는 데에 지치며 신경과민에 걸린다. 신지를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신지가 나루미의 방에 들어오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먼저 방 문 바깥과 나루미의 모습이 같이 나오게끔 찍은 다음, 놀래 키려는 사람처럼 나루미의 뒤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선다. 나루미가 화들짝 놀라며 카메라를 바라보자 바로 다음 컷에서 똑같은 방 문 바깥 위치에 무뚝뚝하게 서 있는 신지의 모습이 보인다. 세 번째 컷의 위치는 첫 번째 컷의 위치와 같은데, 결코 귀환이나 복기의 감정이 없으며 쥐죽은 듯 방에 침입한 신지의 행동을 묘사한다. 인물을 따라가지 않으려는 카메라는 굳이 기요시의 영화가 아니어도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정면이든 측면이든 카메라는 인물을 따라감으로써 중심을 구축하려 하지만 일시 정지하는 순간 존재하던 인물은 표면에 흩어진 궤적처럼 본 사람의 기억으로 하여금 더듬어져야 한다. 나루미에게 있어서 신지의 표면은 처음 아는 사람을 집에 들여 놓았을 때의 감정 이상 이하도 아니다. 신지의 돌발 행동은 지구인에게 있어 사랑이나 믿음 같은 말들로 정립되지 못한다.
드라마 <예조 산책하는 침략자>가 외계인의 존재를 개념을 빼앗아오기 위한 도구로써 지구인을 착취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차이점, 분명한 위계를 동반하는 현상의 거시성을 부각시킴으로써 확장을 시도한 데에 비해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는 개념을 뺏기 위해 가이드에 의지해야 하는 외계인의 처지와 이 과정에서 신의를 다루는 모습이 추가되면서 외계인을 바라보는 지구인의 시선이 차지할 자리를 마련한다. (두 작품 속 외계인은 모두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줄 알지만 영화 속 가이드는 지구에서 살인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인지시킨다) 외계인의 등장이 지구인의 일상 평면에 일으키는 균열은 프레임 평면 위에서 부유하듯 침입하거나 소멸하는 동체의 인상으로 현현되는데, 이것이 지구인 주인공들의 경험과 감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영화를 보다 세부적으로 만든다. 세 명의 외계인인 신지나 아마노, 아키라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도 사쿠라이에게 접근한 후생노동성 간부의 갑작스러움, 나루미를 추행하는 직장 상사의 손 등을 빌려 곳곳에서 뻗어 나온다. 그러나 폭력과 현장의 실제성 대신 빈 공간을 내재시키는 건 동질성과 맞닿은 양가 상태, 유령의 출현이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정확한 곳에 정확한 상태를 넣는 듯한 착각을 준다. 사운드와 특수효과를 비롯한 디제시스 외부의 개입은 픽션의 맥락을 단정 짓게끔 하기에 충분하며 배경 음악의 사용은 적시에 감정을 유발한다. 많은 요소가 밀축된 지점의 발생에 따라 그 외 지점의 헐거움이 돌출되어 일정한 디제시스를 주름잡는다. 선형 구조에서 만들어진 소-밀 양상은 외부로의 일반화를 제어하며 평면 바깥 평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유령은 실재적 경험에 의해 구성되고 다시 경험을 구성하며,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다. 프레임을 믿는 순간 소멸-출현을 반복하는 존재의 유령성은 소름끼칠 정도로 표면 깊숙이 체화를 시도하며 관객의 감각은 영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요소인 “개념” 너머까지 마비되기에 이른다. 드라마에서 폭력적으로 침묵하며 성큼성큼 다가오던 외계인의 발자국을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는 기요시 식 유령의 일원으로 만들어 편입시키는 데에 훌륭히 성공한다.
영화의 중심이 되는 세 명의 외계인이 함께 모이는 순간을 기점으로 영화는 점점 종국을 향해 다가간다. 이 기점 이전, 신지에게 일어난 일과 아마노, 아키라에게 일어난 일은 특정 시간대를 공유하는 듯 번갈아 등장하며 서로 마주보고 대화를 하듯 비슷한 일을 했음에 대한 동의와 차이가 중첩된다. 지구 침략을 위한 임무가 있고 신지가 하는 일과 아마노, 아키라가 하는 일이 다름에도 똑같은 표면 외부의 침입자라는 설정이 둘의 상태를 비슷하게 이끄는 것처럼 느껴진다. 허나 세 명이 함께 모이고 흩어지는  이후 두 상황의 시간대가 공유되는 일은 없어진다. 낮에 아키라와 아마노에게 일어난 일을 그린 장면이 나온다면 그 다음 장면은 그 날 밤 신지에게 일어난 일을 다뤄야 하는 식이다. 겹치는 일 없이 개별적인 시간대를 공유함에 따라 -갖은 설정과 카메라 등을 통해 구축되어온- 영화의 중심이 시간대에 대한 관객의 이해에 의지하게 되면서 종착지에 대한 믿음을 일순 미루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산책하는 침략자>의 GV를 비롯한 많은 반응들은 사랑이 인류를 구원했다는 테마에 주목하곤 한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와 그 장면을 찍는 데에 있어 필요한 것은 나를 찍은 숏과 타인을 찍은 숏과 두 명이 함께 나오는 숏의 세 가지이다. 다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에 있어서 이 중 하나는 아무도 모르게 사그라들곤 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껴안고 있을 때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영화의 결말부에서 신지가 나루미의 부탁에 의해 사랑이라는 개념을 뺏어오자 나루미는 “아무 것도 바뀐게 없다.”는 말과 함께 무력감에 빠진다. 그러나 신지는 굉장하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루미를 이끌고 방 바깥으로 뛰어간다. 바로 다음 외계인의 침략이 시작되기 직전 둘이 절벽에 올라간 순간 숏에는 두 사람의 측면이 들어온다. 나의 얼굴을 나 스스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거울은 중요한 도구이다. 화면이 암전되고 2달 후라는 자막이 뜨면 귤 상자를 들고 가는 신지의 모습이 보인다. 인류 피해 복구 시설에서 일하고 있던 외계인 신지는 의사로부터 나루미의 질환에 대한 원인을 찾기가 힘들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가만히 앉아 있는 나루미를 보며 “너를 영원히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면 나루미의 얼굴이 화면 전체를 장악한다. 두 번의 말 사이에 삽입되었던 숏은 객관적인 감정 중심보단 두 얼굴에 대한 지워지지 못하는 부동성의 한계를 지적한 셈일 테다.
나루미가 무력감에 빠지기 직전 출몰한 “아무 것도 바뀐 게 없다”는 말은 나루미가 직접 깨달은 사실이 스스로를 그렇게 만든 듯 느껴지게 한다. 마치 사랑이 개념으로 정립되는 것이 아닌 착각을 준다. 허나 결말점을 가능케 하는 신지의 변화는 그런 착각을 배제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수도 없는 도식화는 기정된 조건들을 작동하게 하고 감각에 대한 원인을 굳이 탐색하게 만든다. 중간에 직립한 숏으로 하여금 대칭을 비춰보게 만드는 거울과 거울 속에 비친 영화의 그림자가 관객으로 하여금 표면 외부의 유령을 바라보게 한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훌륭한 유령론 영화이다. 동공이 풀린 나루미의 얼굴을 거의 마지막에 넣는 등 여전히 절망에 가득 찬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이다. 


현정우  kubrick45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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