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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호/독자의 시선] 너 한국인이었어

하주현(환경교육·15)l승인2018.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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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학기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그동안 “너 한국인이었어?”라는 질문을 스무 번 남짓 들었다. 질문을 하는 친구들, 어른들은 모두 나를 홍콩 현지 학생으로 보았다는 말을 덧붙인다. “아~ 그랬구나. 나는 한국인이야”라고 답하지만 그때마다 내 속에서 어떤 억울함이 불쑥 올라온다. 왜 그럴까. 나의 인종주의 때문인 것 같았다. 미의 기준이 서구화된 지금 하얗고 늘씬하고 샤프한 서구형 미인이 저들이 보기에도 아시아인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겠지? 홍콩보다 북반구에 있는 한국인이 좀 더 하얄 것이고, 더욱이 한류의 힘이 센 홍콩에서 홍콩 사람들은 한국인들의 생김새를 더 좋아할 거야. 이런 일련의 생각들. 은연중에 나는 홍콩 사람보다 한국 사람의 외모를 우위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한국인이 아닌 줄 알았다고? 그래. 나는 하얗지도, 늘씬하지도 않다. 또 한국식 화장도, 신경 쓴 옷차림도 하지 않았다. 한국의 친구들에게 내 사진을 보내주면 옷차림이든 얼굴이든 머리 스타일이든 완전 홍콩 현지인 같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웃음이 터진다. 내가 봐도 난 홍콩인 같아(깔깔). 뭐가 웃겼을까. 서양인 같다는 반응이었으면 에이~ 아니야. 라며 겸손한 체 했을 텐데!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억울함은 외모지상주의나 인종주의보다 가난을 혐오하는 데에서 나온 것에 더 가깝다는 판단이 선다. 한국인 친구와 이런 말을 했다. “동양인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유럽을 정복해서 세계사가 바뀌었으면 백인들 되게 못생겨 보일 거 같아. ‘괜히 못 살아 보이고’.” 우리의 이 대화에 어떤 사실이 숨어 있다고 본다. 못생겨 보이는 것은 가난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는, 그리고 나를 비롯해 어떤 사람들은 가난을 멸시한다는 사실이. 미디어에선 홍콩을 ‘자본주의의 총아’, ‘빼곡한 빌딩’의 이미지로 나타낸다. 하지만 잡다한 물건이 즐비한 거리, 웃통을 벗고 다니는 아저씨들, 때 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야채와 과일, 거리를 지날 때마다 머리에 떨어지는 에어컨 실외기의 물방울 등 한마디로 홍콩은 ‘후진국’, 더 솔직히는 ‘못 사는 나라’ 티가 진하게 난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속에서 이곳의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자라는 게 느껴진다. 아, 정말 이런 나라에서 살기 싫다. 이런 데서 사는 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이렇게 못 견디겠다는 듯 말하면 내가 좀 더 고상해지기라도 하는 양. 한국보다 높은 홍콩의 경제 지표는 뒤로하고 “홍콩은 구질구질하다. 그러니 홍콩사람 같다는 말은 욕이다.”라는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이다.

한편 진짜 선진국 핀란드에서 온 친구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한 마디씩 한다. 버스가 무너질 것 같아. 여기 냄새가 이상해. 이런 시장 한국에도 있어? 우리는 이런 거 없어. 한국에서도 돼지껍데기를 먹어? 고기를 이렇게 걸어놓고 파는 건 처음 봐. 시장에서 파는 야채는 사먹지 말라고 들었어. 그런 말을 나는 꼬아서 듣는다. 한국에도 있냐는 건 왜 물어봐. 너희 나라는 시장바닥에서 물건 안 팔고 고상하게만 살아서 이런 거 보니까 신기하니? 명치까지 올라오는 말을 밀어 넣는다. 질문의 의도가 어떻든 나는 나의 가난을, 한국의 가난을 공격받은 것 같다. 내 안에 가난과 가난을 이고 사는 사람의 인격이 비례한다는 공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투명한 가난 혐오다.

하지만 나는 나를 변호하고 싶다. 아름다움과 청결함을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고린내가 나는 음식보다 하얀 접시에 싱그럽게 담긴 음식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인도와 가판의 구분이 안 되는 복작이는 시장보다 여유롭게 거닐 수 있는 쇼핑몰을 선호하는 건 본능 아닌가?

그런데 가난 혐오는 스스로에게도 멸시의 시선을 던진다. 얼마 전 친구가 동창을 만난 얘기를 해왔다. 그날 술자리엔 가상화폐로 몇 십억을 번 친구가 중고 가격으로 2억 6천인 외제차를 타고 왔단다. 다른 친구들 역시 가정환경이든 진로든 지금 만나는 연인이든 범상치 않아 대한민국 최상류층 청년들의 삶을 보는 듯했단다. 그리고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다고 했다.

나 역시 친구가 보내준 그 외제차 영상을 보고 한동안 힘이 빠졌다. 그러고 보니 얘네는 SNS도 안하네. 아, 이렇게 살면 자기 삶을 전시할 필요도 못 느끼겠구나. 비싼 음식, 화려한 공연, 여행이 일상일 테니. 그에 비하면 내 삶은 너무 시시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난 저런 삶을 살 수가 없겠구나. 내 삶 참 보잘 것 없다. 그렇게 한참을 우울해하고 있을 즈음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얼굴들이 떠올랐다. 1년을 일한 돈으로 프랑스를 이집트를, 곳곳을 다녀오며 그곳에서의 경험을 기록하고 책으로 출간하려는 한 언니를, 감각적인 사진과 글로 가득한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보고 있자면 내 삶도 이처럼 다채롭게 만들고 싶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한 동생을, 평생 성실히 일해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살려온 내 부모를, 동기들 생일마다 작은 편지와 선물을 잊지 않고 챙겨 그들이 자기 삶의 무게를 새삼 느끼도록 하는 동기언니를. 그 얼굴들을 떠올리니 상류층의 삶에, 선진국 국민의 삶에 내가 느낀 열등감이 우스웠다. 내 주변 사람들은 그런 상류층이 아니다. 그럼 그들의 삶은 시시한가? 결코 아니다. 나의 가난 혐오 알고리즘이 이제야 깨진다.

가난을 낭만화하고 싶지는 않다. 가난은 해결해야 한다. 많은 경우 가난은 낭만은커녕 의식주를 영위하는 것까지도 침해해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이 문제인 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인격과 삶 역시 문제적이며 보잘 것 없을 것이라는 인식엔 선을 그어야 한다. 그런 사고는 가난한 사람들을 납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은 이 정도만 해줘도 엄청 좋아하겠지. 원래 더럽게 살았을 테니까 내가 이정도로 지저분하게 행동하는 건 괜찮겠지….’ 이런 식의 멸시와 단순화를 낳는다. 그래서 피아노 진도로 체르니30을 나가고 있다는 후원아동의 말을 듣고 화가 나 후원을 끊은 사람이 있고, 체인점에서 일식 돈가스를 먹고 있는 기초생활수급 남매를 보고 사회복지센터에 항의 전화를 거는 사람이 있는 걸 테다. 가난한 사람은 보잘 것 없어야 한다는, 누릴 수 있는 의식주와 문화 수준의 한계선이 응당 정해져 있기라도 해야 한다는 가난 혐오다.

나만 보면 영어가 아닌 광둥어로 말을 거는 홍콩 사람들에게 슬쩍 신경질이 나고, 또 그런 스스로의 저열함에 괴로워하길 반복해온 한 달이다. 이제 무력한 감상주의에서 벗어나 남은 시간 동안 나의 가난 혐오를 이겨내고 싶다. 얼마 전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곳 어촌의 집과 빨랫줄에 걸린 해진 옷가지들을 보고 나는 개미 군집을 떠올렸다. 그저 자식 낳아 가족 꾸리고 안 굶고 살면 그만일, 자기 삶에 무게를 두지 않고 집단 자의식만을 갖고 살아갈 사람들이라며 경멸의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그 시선은 곧 ‘나는 뭐가 얼마나 다른가’하는 물음으로 바뀌어 나를 향했다. 이제 좀 달라졌을까. 그 어촌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답을 말해줄 것이다. 오늘 저녁 나의 가난혐오를 확인하러 나가야겠다.


하주현(환경교육·15)  knue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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