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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호/영화도서관] 사전 정보 없이 봐야 하는 영화들?

현정우l승인2018.10.01l수정2018.10.03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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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이 끝날 무렵 개봉되었던 두 영화를 본 관객의 동일한 반응은 예상 가능하면서도 곱씹을 만한 것이었다. “가능한 사전 정보 없이 보는 게 좋다”는 말이 중요한 듯 따라왔고 감상의 역점 또한 이 점에 맞춰졌다. 이 말은 두 영화 이전의 다른 작품들에도 붙은 적이 많이 있다. (당장 재작년 <곡성>의 경우만 봐도 특정한 논점을 인증하여 붙는 말이 아니다) 최근에는 이 말을 게임 후기에서 많이 본 듯한데, <스탠리 패러블>이나 <언더테일>처럼 메타 픽션을 시도한 물건에서 주로 본 기억이 난다.

<서칭>이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점은 어디일까. 경험 조건에 있어 비백인 주인공의 감각을 적극적으로 사유화했다는 점에서 드물게 느껴졌다는 점에서였을까.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늦은 시간임에도 관객들의 눈을 생생하게 깨어있도록 한 것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서칭>이 무기삼고 있던 것은 관객이 모르는 ‘진실’을 얼마만큼 보여주고 감출 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특권이었다. 흔히 서스펜스라 불리는 것일 텐데, 긴장과 갈등의 촉발점이 될 사건에 관객이 얼마나 이입할 수 있는지를 위한 기본 능력치가 폭넓게 한정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단지 영화가 우리에게 친숙한 사물들을 활용하고 있음이 아니었다. -그 점은 이전에도 무수한 일례가 있다.- 스크린 앞에서 영화의 정보값을 받는 위치를 영화가 찍힐 수 있는 환경으로 하여금 제약하게 한다는 점에 가까웠다.

영화가 찍히는 환경은 제작 인력에서 비롯되곤 하는데 <서칭>은 정보 처리 매체를 이용해 이를 제한하도록 착각을 준다. 페이스타임과 부재중 전화, 아이폰, 유튜브, 뉴스 자료 화면까지 정보 가치를 갖는 한 모든 것을 총동원하는데 관객이 이를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안심하게끔 만든다. 영화 내내 영화, 정확히는 숏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카메라는 카메라에 찍히는 중인 ‘현실’에 변화가 없는 한 움직이지 않으며 어떠한 개입도 가하지 않는다. 가상의 단위였던 프레임을 영화 전체를 유동시킬 수 있는 실체로 둔갑시키는 셈이다. 자신의 시선이 충분히 객관적이라는 조건부 자유 내에서 관객이 <서칭>의 진실에 갖는 믿음은 한결 공고해진다. 이 믿음 속에서 영화는 마음껏 중요한 부분을 확대하기도 하고 뻔한 복선에선 일부러 멀리 떨어지기도 한다.

조금 더 윤리적인 문제를 논해야만 할 필요성이 있다. 관객의 판단을 자취와 흔적에 집중시키는 건 서스펜스의 형태이다. 혈흔을 위해 혈흔을 흘린 사람을 유보시킬지 또한 서스펜스의 책임이다. <서칭> 속 단서의 대부분은 아버지 데이비드에 의한 것이다. 그는 딸 마고와 연락이 두절되자 실종신고를 한 채 사망한 아내의 노트북과 딸의 SNS를 속속들이 조사하며 마고의 친구들에게 연락을 한다. 비밀번호를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개인정보 체제의 유약함은 실마리를 더 가까이 잡기 위한 발돋움으로 접힐 뿐이다. 마고는 자신의 사적 공간이 밖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에 아무런 제재를 취할 수 없다. 데이비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가 데렉을 패는 장면이 유튜브 실시간 영상으로 영화에 송출된 것을 기억하는가? 페이스타임을 제외한, 정면으로 카메라를 응시하지 않는 대부분의 숏에서 찍히는 사람은 자신이 찍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혹은 알지 못해야 한다.- 이 사실을 필요로 하는 목적은 관객이 영화에 기대하는 ‘진실’과 같다.

영화를 다 보고 관객이 아주 재밌었다고 안심하며 일어설 수 있다면 안 좋은 영화라는 말미가 생각난다. 그 말을 온전히 납득하진 않지만 <서칭>의 경우는 그렇지 않을까. 영화의 결말이 다분한 여성혐오인 것은 말할 것 없다. 희생정신과 집념으로 부성애를 숭고하려는 의지와 모성애를 극성으로 치부하며 혐오하는 시선은 다르지 않으나 <서칭>은 둘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부러 강화하는 결말을 선택한다. 스스로 자제하겠다는 말도 아랑곳없는 데이비드의 의심은 관객이 진실에 갖는 집요함과 동치인 듯 단서의 일면을 지탱한다. 이 의심을 끝내는 건 강력한 반전, 알고 보니 어머니가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작전을 꾸며서 모든 일이 벌어졌다는 한 마디다. 퍼즐의 해답인 듯 극대화된 한 방의 결말은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출소자의 목숨마저 쥐락펴락하는 경찰 권력과 갔던 곳을 대라며 윽박지를 수 있는 비-청소년의 힘, 마고의 고민, 로버트의 문제, 이외에 수많은 것을 지워버린다. 산재한 복선들은 관객들의 뇌리에서 이것들을 지워야만 목적지로의 역할, 진실을 깨우치게 할 조각으로써의 역할이 가능하게끔 설치되어 있다. 데이비드와 마고가 환하게 웃는 사진이 꾸며지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큰일은 이제 끝났다고만 말해주는 듯하다.

 <서칭>은 폭력적인 영화다.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을 외부의 것으로 인식시켜 관객의 위치를 안전하게 만든 다음 권력의 작동 양상은 깨끗이 지워버린다. (수많은 효과가 그렇지만 특히) 마지막 사진을 아련하게 만들면서 데이비드의 ‘바뀐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과거를 숙청하는 태도는 지나치게 낙관적이며 끔찍하다. 권위 현장에서 낙관론은 어떻게 수행되는가. 영화가 잇는 갈등이 첨예하게 조직되어 있을수록 관념적으로 생각하기는 힘들어진다.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상태가 시간 본위에서 유지됨에 따라 결말은 단순한 끝보다 그곳에서 끝을 낸 이유 또한 책임져야만 한다. “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한 마디 속 모두는 스크린 앞에서 웃고 있는 인물들만 포함할까.

 

그런 점에서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농담은 때로 기만적이라 느껴진다. 영화가 웃음을 유발하는 지점은 앞서 제시되었던 35분짜리 원씬-원컷 생중계 좀비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밝혀지는 과정에 있었다. 이 생중계 영화는 카메라가 비추는 곳의 상황만 전달하고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 신호가 약해지듯 영화가 끝나면 화질이 전혀 다른 제2의 영화가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초반 35분을 버티라고 말한 이유라도 된다는 듯이, 제2의 영화는 앞의 영화의 무슨 부분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한 순간씩 연속적인 시간 순서에 따라 선보인다. 알고 보니 이 인물이 이런 인물이었고 그래서 그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몇 번의 컷으로 더 보여주는 것이다. 보는 사람으로서 한 번 겪은 시간을 지연시켜 한 차례 더 겪을 기회를 얻는 셈이다.

“사전 정보 없이” 보는 게 좋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줄거리와 사건의 단서를 미리 알 경우 재미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한 번도 안 본 뇌 삽니다.”라는 문구 또한 이 감상과 이어져 있을지 모른다. 영화를 한 번도 보지 않아 감각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가 재미를 유발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일까 궁금했다. <서칭>과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 모두 감춰진 정보를 하나 둘 흘리거나 터주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제2의 영화에 앞서 원본의 영화, 카메라가 보이지 않는 한 편의 완성된 영화를 보여줌으로써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궁금증을 가진 관객은 보다 영화에 몰입하고 집중하기 쉬워진다. 제2의 영화와 제1의 영화는 다른 화질로 찍혔지만 크레딧과 크레딧 (어쩌면 입장과 퇴장) 사이에서 지속된 한 편 내의 또 다른 평면을 구성하고 있기도 하다. 관객에게서 창출된 감각은 적어도 그 동안은 유효할 것이다.

영화 촬영 중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터지면서 관객이 미리 본 적이 있던 상황이 슬슬 짜 맞춰지기 시작한다. 감독 히구라시는 주연 배우들에게 사고가 나자 고등학교 연극부 출신임을 자처하며 주연을 맡기로 결정한다. 전업 배우였던 히구라시의 부인 하루미도 딸 마오의 결정으로 주연을 대체하기로 들어간다. 액션 한 마디가 떨어지고, 한 번 보았던 영화를 찍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 번 더 볼 수 있는 시간이 흐른다. 촬영 스탭들은 물론 방송편성실에서 긴장하고 있는 사람들과 방송국 상무들의 모습도 보인다. 영화 속 감독의 첫 번째 역할은 촬영을 멈추고 배우들에게 “진짜” 연기를 하라며 소리 지르는 것이다. 감독이자 주연으로서 영화 속 감독을 연기하게 된 히구라시는 이 기회를 틈타 촬영 전부터 불평이 많았던 배우에게 엄포를 놓는다. “너는 리허설 때부터 무슨 잔소리가 그렇게 많아?” 대본에 없는 대사와 지시문에 사람들은 놀라지만 촬영은 계속 진행된다.

촬영이 무사히 끝난다. 영화 속 장면과 그 장면을 만들기 위해 투입되는 노력, 영화 안과 밖을 번갈아 오가던 카메라는 드디어 끝났다는 큐 사인처럼 영화를 만든 사람 한 명 한 명의 웃는 얼굴을 정면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촬영장에서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위에서 찍으며 화면이 어두워진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의 결말이다. 기어코 이 영화를 만들고야 말았다, 는 사실 하나의 기쁨이 제1의 영화와 제2의 영화를 한 데 아우르듯 감동을 선사한다. 초조해하고 긴장해야 했던 스탭들의 한 땀 한 땀은 결국 해냈다는 결실 하나에 돌이킬 수 있는 추억쯤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하나의 유쾌한 농담처럼 느껴진다. 술자리에서 풀 수 있는 썰처럼 그 때는 그랬지 하며 서로 악감정 갖지 말고 확 풀어버리고 말자는 식이다. 영화의 각색 방식에 의문을 갖던 신인 배우는 영화가 끝날 때쯤 지친 모습으로 촬영에 수긍한다. 미리 말씀드렸다면서 자신의 물을 준비해주지 않았느냐 따지는 녹음감독의 추궁은 카메라 한 쪽으로 사라지며 기획 단계의 ‘흔한 풍경’인 듯 멀어진다. 낙관론은 권위 현장의 어떤 조건을 수행하는가?

퍼즐 조각을 짜 맞추듯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정보를 충족시키게 만드는 과정은 게임의 작업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어떤 장르에서든 처음 플레이를 시도할 경우 플레이어는 게임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한 채 튜토리얼과 NPC의 지시를 따라야만 하니 말이다. 정해진 조건 내에서 캐릭터를 구성하고 스토리를 완성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 스토리의 결말이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정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인지는 관객의 취향에 따라 다르다고도 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미 정해진 상태에 가깝다. 아무리 영화가 열린 결말이어도 꽁꽁 취해진 질문은 바뀔 수 없다. 감각과 감정을 중심으로 하는 어떤 예술 매체도 자유로울 수 없다. <서칭>의 주술이 일깨우는 착각이 현실에서 직접 적용되는 사례,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이룬 형상임은 중요하지 않다. 시선을 고정시킨다고 해서 -혹은 친숙한 사례를 끌어온다 해서- 영화를 바꿀 수 있을까? 서스펜스, 농담, 경이, 반응을 끌어오기 위한 수많은 시도에 감춰진 것들은 왜 끝까지 보이지 않도록 여겨지는가.


현정우  kubrick45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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