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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호/기획]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김지연 이현주 김동건 김수빈l승인2018.04.16l수정2018.04.1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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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은 제주 4·3 사건이 발생한지 70년이 되는 날이었다. 제주 4·3은 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큰 인명피해를 낳은 비극으로, 이 사건의 희생자는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인 3만여 명에 이른다. 제주도는 4·3 사건 70주년이 되는 올해를 ‘제주 방문의 해’로 지정했고, 전국 각지에서 기념 행사·전시가 열렸다. 한국교원대신문은 제주 4·3 사건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알아보았다.

◇ 3·1절 발포 사건으로 시작된 제주 4·3
제주 4·3의 시작은 사건 발생 1년 전인 1947년 3월 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 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3·1절을 기념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3·1절 기념대회가 열렸고, 이는 제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기념식을 마친 제주도민들은 가두 행진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치여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이 경찰에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무장경찰은 도민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민간인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 1명은 아이를 입은 여성이었으며, 대부분의 사망자는 등에 총을 맞았다. 도망치는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는 증거다.
3·1 발포 사건에 대한 항의의 일환으로 3월 10일부터는 제주 민관 총파업이 이루어졌다. 도청 등 관공서, 은행, 회사, 학교 등 도내 160여 개 기관에서 제주 직장인 95%에 달하는 4만여 명이 파업에 동참하였고, 현직 경찰관의 20%도 파업에 참여하였다.
발포 사건 이후 미군정은 진상조사단을 제주로 파견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하는 대신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주장하는 것을 택했다. 3월 20일자에 작성된 미 24군단 주간정보요약서에는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익단체에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분자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파업 이후 제주를 향한 탄압은 더욱 거세졌고, 특히 미군정이 제주에 파견한 760여 명의 서북청년회(이하 서청) 회원들은 도민들을 향한 약탈과 테러 일삼아 “‘서청! 하면 울던 아기도 울음을 그친다”는 유행어가 돌 정도였다.

◇ 4·3 봉기와 평화협정 파기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와 경찰, 서북청년회 숙소와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일제히 습격했다.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 단선 단정 반대와 조국의 통일 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목표로 한 무장봉기는 ▲경찰 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 사망 2명, 생포1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무장봉기 후 미군정은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령했다. 그러나 9연대는 이 사건을 치안 상황으로 보고, 군이 개입할 성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결과 1948년 4월 28일, 김익렬 제9연대장과 무장대 측 군사총책 김달삼이 만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평화협정 사흘만인 5월 1일, 우익청년단원들이 오라리 마을에 불을 지르는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방화 현장을 비행기와 지상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하여 ‘제주도의 메이데이(May-day on Cheju-do)’라는 영상을 제작하고 방화 사건을 우익청년단이 아닌 무장대의 행위로 조작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평화협상은 깨지고, 김익렬 연대장은 해임당했다. 얼마 후 5월 10일 제주도민들의 선거 거부로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개 지역의 선거가 무산되고, 미군정의 제주 강경 토벌이 시작되었다.

◇ 광기의 시대
본격적인 강경 토벌 작전이 시작된 것은 1948년 10월 17일이었다. 이날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출입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고 무조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같은 해 11월 17일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때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당하고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불에 타 사라졌다. 포고문을 전달하지도 않고 학살을 저지른 곳도 많았으며, 중산간 마을에서 해변으로 소개해온 사람들도 가족 중 한 명만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살했다.
무장대의 보복 습격도 이어졌다. 식량 보급이 끊긴 무장대는 마을에 내려와 약탈과 살상을 일삼았다. 토벌대가 그 지역 사람을 길잡이로 삼는 등 토벌대 편의로 기울었다고 판단되는 마을을 향한 보복 습격도 계속됐다. 사망자의 12.6%는 무장대에 의한 보복 살인이었다. 이른바 ‘초토화 작전’의 사망자는 약 3만 명으로, 그중 21%는 여성, 5.8%는 61세 이상의 노인, 그리고 5.5%는 10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학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부는 각 지구의 불순분자를 체포·구금할 것을 지시하였다. ‘미래의 빨갱이를 미리 없앤다’는 명목의 ‘예비검속’이었다. 제주에서도 예비검속이 실시되어, 1,120명의 제주도민이 모슬포 섯알오름, 산지항 앞바다, 정뜨르비행장 등지에서 단체로 수장·총살·암매장당했다. 제주를 벗어나 육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제주 출신 형무소 재소자 2,500여명 역시 제주로 돌아오지 못하고 행방불명되었다.

◇ 4·3, 은폐에서 화해로
4·3은 오랫동안 권력에 의해 은폐되어 왔으며, 생존자들은 연좌제와 레드 콤플렉스로 고통 받아 왔다. 자유당 정권이 몰락한 1960년 5월 제주대학생 7명이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해 진상규명을 시작하였으나, 바로 다음해에 일어난 5·16 군사쿠데타로 다시 중단되었다. 4·3의 진실을 폭로한 소설 ‘순이 삼촌’은 판매가 금지되었고 소설가 현기영은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 이후로 4·3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87년 4월 3일, 제주대학교 총학생회에서 첫 위령제를 치렀으며, 1989년에는 제주시민회관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인 추모제를 열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제주 4·3연구소가 발족되었고 각계각층에서 진상 규명 운동이 이어졌다. 결국 1999년 12월 16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03년 10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은 4·3유족과 제주도민들에게 과거 국가권력의 과오를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지난 3일 문재인 대통령은 제주4·3평화공원에서 열린 추념식에서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다”, “더 이상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와 함께,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선언한다”는 추념사를 낭독했다.

제주 4∙3 추모 문화제

4월 3일부터 4월 7일 까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제주 4.3을 추모하고 제70주년을 추념하는 제70주년 4.3 광화문 국민문화제가 개최되었다. 낮에는 광화문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날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동백 팔찌 만들기, 동백 보리 아트, 제주 4.3과 관련된 퀴즈 풀기, 관련 상품 판매 등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는 부스가 열리고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누구든 제주 4.3을 추모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전시물이 마련되어있었다. 제주도내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제주 4.3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영화를 제작하여 소개하고 다양한 관련 이벤트를 기획하여 시민들의 참여를 도모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또한, 부스들이 모여져 있는 곳을 지나 광화문 광장 한 켠에 무고한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희생자 이름이 수놓아진 분향소가 준비되어 있다. 저녁이 되면 광화문 설치 무대에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마임 퍼포먼스, 민중가수들의 무대, 대중가요 등 다양한 추모 및 기념 무대가 열렸다.
이뿐만 아니라 4월 3일 당일 오후 4시 3분부터 희생자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부르는 시민들의 퍼포먼스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보는 이로 하여금 이 사건이 얼마나 뼈저리도록 아픈 우리의 역사인지 잘 보여준다.
우리 역사의 아픈 페이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문화제라고 하여 어둡기만 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그 속에서 고통 받으며 죽어간 무고한 시민들을 추모하며 더 나은 내일을 웃으며 기약하는 문화제이다. 그렇기에 이 행사에 참여한 수많은 시민들의 얼굴에도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이를 딛고 나아가고자 하는 다짐이 담겨 있었다.

제주 4∙3 70주년 네트워크프로젝트 잠들지 않는 남도

<제주를 넘어, 4∙3 영화특별전>


지난 6일부터 8일까지 성북구 아리랑시네센터에서 4∙3 관련 영화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 등으로 구성된 ‘4∙3 영화특별전’이 열렸다. 이 영화특별전은 4∙3 70주년을 기념하여 그간 터부시되어왔던 해당 사건을 복원하고 재조명하고자 기획됐다고 한다. 총 3개의 섹션으로 나뉜 9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각 섹션의 주제는 영화 속에 제주의 모습을 담는 오멸 감독의 작품이 주된 <오멸 감독의 제주, 끝나지 않은 역사>, 4∙3의 생생한 기억과 재현을 돕는 <다큐, 기록과 기억 사이>, 그리고 4∙3을 장르극 속에 녹인 <장르, 비극적 역사의 재구성>이다. 한국교원대신문에서는 두번째 섹션 <다큐, 기록과 기억 사이> 중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2: 국가범죄>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겠다.

<레드헌트2: 국가범죄>

레드헌트 연작은 1990년대 후반의 영화이다. 당시 4∙3에 대한 이야기는 공론화되지 못했고 4∙3의 피해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마련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곤 했다. 당시 이념적으로도 민감한 문제였던 4∙3을 다룬 조성봉 감독의 <레드헌트>는 상당히 과감한 시도였고 국가는 이 영화에 탄압을 가했다. <레드헌트>는 이적표현물로 규정됐고 조성봉 감독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에 공식적으로 상영을 하기는 어려워 제주도에서도 성당 지하에서 200여 명이 모여 몰래 이 영화를 봤다. 그러나 이 과감한 시도는 소중한 기억을 남겼다. 4∙3을 겪고 4∙3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음성을 영화 속에 남긴 것은 지금과 같은 훗날 사람들이 4월의 제주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고통이 남겨졌는지 알아가는 데 의미있는 기록이 됐다.

<레드헌트2: 국가범죄>는 4∙3이 아닌 또다른 국가범죄를 보여주며 막을 연다. 광주민주화항쟁의 유가족이 자식의 무덤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장면 이후 “1980년 5월 나는 대학생이었다.”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그리고 ‘1945년 8월 나의 아버지는 스무살이었다.”라는 말이 이어진다. 이 두 문장의 병렬은 아버지와 감독 본인의 세대에 있었던 사건들을 이어 4∙3, 여순사건 그리고 광주민주화항쟁 등 국가범죄가 되풀이 됐음을 보여준다.

<레드헌트2: 국가범죄>의 대부분은 4∙3 피해자들의 증언들로 채워져 있다. 그 당시 아이였던, 엄마였던, 아들이었던 제주 주민들이 본인들의 목소리로 기억하기 힘들지만 잊을 수 없는 그 끔찍한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어떤 분은 총상을 입은 자신의 상처 자국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역사는 계속 이야기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레드헌트>는 이러한 이야기를 사건의 당사자로부터 직접 듣고 이를 영화적으로 재현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재현은 당시 4∙3을 겪지 못한 세대에까지 이것이 역사로 남고 이야기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빨갱이’, 공산주의자의 폭동이라는 명칭이 덧칠되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과거를 벗어나 <레드헌트2: 국가범죄>에서처럼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피해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영화 상영 후, 역사문제연구소 배경식 부소장과 조성봉 감독이 대화를 나누고 중간에 관객들이 궁금한 점을 질문하는 방식으로 감독과의 대화가 진행되었다.
레드헌트 1편의 서사구조와 2편의 서사구조가 달라진 이유는?
96년에 <레드헌트>가 만들어졌다. 그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든 것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다. 당시 수사관들이 영화의 내레이션을 문제 삼고 다큐멘터리가 왜 이렇게 주관적이냐고 했다. 그들에게 수사 후 나가게 되면 영화에서 내레이션 없이 피해자들 영상만 보여주겠다고 했다. <레드헌트 2, 국가범죄>는 제주 4.3이 국가가 저지른 범죄 행위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리겠다는 목적과 생각을 가지고 만들었다. 실제 사례들을, 되도록이면 많은 지역에서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4.3 사건을 상징하고 대변하는 인물을 찾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다큐멘터리 촬영 중 어렵고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제주 4.3을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를 많이 고민했다. 영상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거의 고민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상당히 거칠다.
많은 사람들이 배타성과 피해의식으로 제주도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아 힘들게 작업 했을 것이라고 오해하는데 사실 제주도에서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제주도 사람들은 자기 자식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문제를 육지 사람이 관심을 가져줘서 오히려 고마워했다. 작업 과정에 제작비를 후원받지 않아 경제적으로 힘든 것 외에는 정신적으로는 힘들지 않았다.
감독님께서는 가해자의 주체를 서북청년단, 경찰, 군경토벌대, 미군정, 이승만 이렇게 다섯 가지로 나누었다. 가해자에 대한 책임 추구가 피해자의 보상과 같은 문제로 추진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도 가해자의 범주를 다섯 개로 나누고 가해자의 증언이 들어가 있는데 영화에서 나온 우호적인 가해자가 아닌 정말 사실적인 가해 실상을 알 수 있는 가해자의 인터뷰, 자료 등을 찾아낼 수 없었는가?
인터뷰를 다 거부했다. 몰래 영상이나 음성을 따고 싶지는 않았다. 설득을 했는데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은 굳이 인터뷰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에서 나온 경찰서장, 서북청년단, 경찰 출신 가해자들은 그분들이 이야기하겠다고 해서 인터뷰를 받았고 나름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고 반성적 자세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했다.
4.3의 해결을 위해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또한 앞으로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으면 하는가?
제주 4.3의 핵심은 국가가 저지른 범죄라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제주 4.3을 사과했고 문재인 정부도 그 부분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제주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학살의 주체인 국가가 진상 규명, 책임자 규명을 정확하게 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가가 전체 식순을 마련하고 추모제, 위령제를 주관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4.3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활동을 해온 연구자, 시민단체, 유가족 중심으로 위령제와 추모제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 보상에 대한 문제에서 개별 보상 문제는 반대한다. 공동체 보상 형태가 되었으면 좋겠다. 의료센터나 그 이후로도 관여했던 사람들에 대한 장학금 등의 공동체 보상 형태로 보상하면 4.3과 관련 없는 사람들도 이득을 볼 수 있게 되어 공동체적 선을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개별적으로 보상이 이루어져 만약 역사의식 없는 사람들이 돈을 받아서 쓰게 되면 역사적으로 희생된 사람들에게 보답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북예술창작터, 성북예술가압장 – 너븐숭이 유령>

<잠들지 않는 남도>가 전시되고 있는 서울의 여섯 공간 중 두 곳을 가보았다. 성북구에서는 ‘너븐숭이 유령’이라는 이름의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너븐숭이’는 하루 만에 가장 많은 주민이 학살 당했던 장소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 되는 장소라고 한다.
이 전시에서는 총 11명의 제주, 서울 작가가 제주 4∙3의 정신을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4∙3의 본질에서부터 여러가지 사회적 사건 그리고 개인적 트라우마까지 시선을 확장하고자 했다.

<도서전시>

제주 4∙3을 최초로 실은 소설인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중심으로 관련 콘텐츠를 전시하고 있는 아리랑도서관에 찾아가 봤다. 전시는 4월 30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김지연 이현주 김동건 김수빈  knuepre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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