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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호/독자 칼럼] 공론화

현정우l승인201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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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곳에서 작금의 미투 운동을 마주하면서 들었던 가장 큰 생각은 공감에 대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피해자가 직접 사건의 무게를 떠안아야 하며 스스로 고통을 호소해야만 그것이 “있는 것”으로 읽혀지는지 그리고 왜 이후에 감당해야 할 언론의 질문과 외부자의 시선마저 피해자의 것이 되어야 하는지 모든 게 답답하게 느껴졌다. 사법 비계의 부실함과 더불어 지극히 가부장적인 경찰 구조에 우선 책임이 있겠지만 이전 세대가 사회 전반의 인식이라고 뭉뚱그리던 개인의 의식 나아가 언론이 짜는 틀과 경험에 대한 접근이 모조리 끔찍할 정도로 엉뚱한 곳을 향해 공격하고 있는 모습에 맞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창 미투 운동에 대한 사회적 여파가 일어날 때쯤 한 이론가 - 따지고 보면 특정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이론가와 이외에도 가해자의 지인들이 그러했지만 - 가 작금의 운동의 모습을 윤색함이란 말로 비판한 적이 있었다. 정말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어디가 윤색하다는 걸까? 그렇게 많은 공부를 해오고 접해 왔다는 이론가가 성폭력과 성추행 사실에 대한 피해자의 고통이 드러나는 방식에 있어서 그런 표현을 썼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피해자들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호소하고 사법적인 처리를 부탁하기에 대한민국의 사법 시스템은 조금이라도 말을 들어주기보다 전후와 유신 제국을 군림해 온 가부장 질서 위에 사상누각으로 눌러앉은 헌법을 들여다보기에 긍긍하다. 그들은 상담사가 아니라고 자칭한다. 가출을 하거나 자퇴를 해서라도, 조직으로부터 나와서라도 피해를 당했던 사실을 알리고 수사 절차에 따라 적법한 보호와 절차를 요구해도 그런 말을 들은 경찰에게서 제일 먼저 나오는 건 “피고분이 잘못하신 건 없는 거죠?” 같은 말 - 혹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죠?” -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방법은 조금이라도 법적 신변 보호를 장담 받는 온라인 상 에서의 익명성 제보였고, 미투 운동이 온라인 환경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음은 이미 여러 차례 제보된 사실이다. 그러나 온라인 제보가 본격적으로 밖으로 나와 언론과 일반 대중에게 받는 반응과 해결 절차는 사법 구성원들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수사에 착수하는 과정에서 경찰 및 검찰은 피해자의 신변 보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언론기관은 피해자가 갖고 있는 소수자성을 이용해서 조금이라도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걸려고 노력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들을 보면서 매체 너머의 대중들, 구설수를 만들기 좋아하는 소위 논객들,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는 마치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키겠다는 듯 이론가, 학자들은 다양한 음모론을 덧붙여가면서 피해자가 하필 지금 이 시국에 호소한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라며 의심을 하고 나섰다. 2차 가해라는 지적은 자기들이 가해를 할 리가 없다는 근거 없는 자만심에 철저히 파묻혀졌다. 피해자가 직접 방송에 자신의 모든 신상을 공개한 채로 범행을 폭로했음에도 많은 대중들은 그 사람이 원래 그랬을 리 없다는 자신감에 가까운 자기 최면 내지는 믿음으로 묻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윤색함이란 표현이 어디에 붙어야 맞는 걸까? 그걸 그렇게 보이게 만들고 그렇게 듣고 그렇게 말한 게 먼저 누군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나? 그 사이에 벌써 가해자들은 자숙이나 사임을 핑계로 “잠시” 잠적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자해를 하는 식으로 다중의 가해 및 보복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다.
(심지어 사건을 터뜨리는 쪽인 피해자가 그 무게를 짊어져야 함에도 불구한) 폭로 이후에는 언론사가 자본과 언론사의 이미지, 기사의 자극성을 고려해서 그것을 공론화함으로써 여론을 형성하는 일이 이어졌다. 공론화라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주체가 언론사이며, 법인은 철저히 자본에 숙청된다는 자살에 가까운 믿음은 피해자의 호소를 가해자에 대한 지목과 기존에 가해자가 갖고 있던 조직 내, 사회 평판에 있어서의 권력에 기대어 여론을 조성해왔다. 기사에 딸려 오듯 사건 외부에 있던 일반의 웅성거림은 대부분 이에 기인하고 있어서인지 가해자가 기존에 권력과 명망을 지니고 있던 점을 잠정해 믿을 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거나 사건 바깥으로 도드라진 추태나 끔찍한 전시물들에 집중해 버린다. 한국 사회가 기존에 따라 왔던 성 엄숙주의 - 성에 관련된 것을 대부분 부도덕하게 검열해왔던 일련의 행태들은 ‘성’이라는 접두어가 붙는 순간에 그것에 소외감을 느끼도록 충동해오고 있다. 미투 운동의 촉발이 된 문학인을 보호하겠다며 당시의 다방 주인이 썼던 전문에서 그런 문화는 힘든 시기에 위로를 받고자 “당연히” 여겨졌었다는 말들처럼, 보다 은밀하고 음지적 시선에 갇힌 채로 태연하게 자행되어왔다. 폭력과 인권유린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졌던 건 굳이 성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어도 많았다. 군대 문화에 가까운 조직 문화부터 시작해서 체벌도 그랬고, 군기도 그랬으며, 두발규제, 엠티 문화, 선후배간 장기자랑도 그러했다. 하지만 학생인권이라는 말이 등장했고 총학생회가 만들어졌으며, 가정폭력, 아동학대라는 말이 수면 위로 떠올라도 아무렇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인간이 만든 어떤 것도 인간이 파괴할 수 있다. 성폭력이 성폭력인 세상은 만들어져야만 한다.
피해자가 스스로 눈총을 짊어지면서까지 시작된 운동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마주하는 것이 선민들의 음모론과 의심, ‘성’이라는 딱지 밑에서 자행되는 외부로부터의 온갖 언어폭력과 혐오의식이라는 점이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가스라이팅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성폭행이 일어났던 조직이 작아질수록 가스라이팅은 더욱 심해진다. 카르텔과 같은 대량의 인맥이 포괄되었던 대표적인 미투 운동의 촉발 지점 말고도 다양한 지점에서 아직도 제보되지 못한 성추행이나 제보되었음에도 매장당한 성추행들이 남아있다. 제보들은 사건을 뒷받침해 줄 목격자와 증언의 부재, 혹은 그 조직이 기존에 갖고 있던 성향이나 권력에 따른 신념이 규모의 협소함과 더불어 맹목적일 정도로 집요하다는 점에서 쉽게 공론화되지 못할 때가 많다. 대표적으로 시네필이나 오타쿠, 웹툰 등으로 축소되곤 하는 서브 컬처 조직에서의 남성권위자들부터 중학교나 고등학교, 대학교 등 교육현장에서 교원에 의해 자행되는 성추행의 경우까지 수많은 사건이 제대로 된 내사 착수나 공론화에 돌입하지 못했다. 돌입된 이후에도 사법 절차들은 이 사건에서의 성폭력을 가해자에서 피해자로의 개인 대 개인의 상황으로만의 인지한 채 범죄의 반복성이나 조직적 권위는 입 씻은 채 사건의 사실 확인 여부 - 이 과정에서 공소시효라는 제재가 가해진다 - 판단이라는 표상을 훑는 데에만 주력했다. 공론화라는 순간을 공론장으로의 진화에 염두를 둔 채 넓어진 표상에 반응된 혐오감에만 골몰하여 스캔들이나 추문 따위의 단어를 붙이는 언론 및 일반의 인식 역시 나을 것이 없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순간에 덧대지는 사람들의 눈에 보인다는 공연성의 상태가 그들이 얘기하는 질서로 하여금 이유 모를 두려움을 갖게 한다는 점에 기인하는 듯 해결의 실마리는 난국에 대한 실마리, 피해에 대한 공감과 해결에 대한 대책보다 사태를 이렇게 만든 사람에 대한 책임과 혐오를 광장의 꼭대기로 올려놓았다.
기존에 지켜져 왔던 질서와 구조가 뒤틀리고 변화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움직임은 어느 곳에나 있지만 유독 대한민국에선 이것이 굉장히 기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공론화 이후에 이어진 소 처리는 가해자의 복권 움직임으로 기울어가는 중이다. 공소시효는 폐지되었지만 여전히 무고죄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가해자로 하여금 기소권을 획득하게끔 한다. 권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사건 밖의 사람들은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먼저 안다. 가해자의 이름이 명성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조차도 배심원과 방청객은 재판에서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서 더 많은 것을 갖는다. 공론화가 이루어진 후의 공론장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피해자가 갖고 있는 것은 피해 사실 뿐이며 심지어 이것마저도 피해 사실을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소송에 처분될 가능성이 있다. 페미니즘의 공교육화나 공소시효 폐지 청원에는 대응했던 정부가 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없애 달라는 청원에는 끄덕하지 않고 있는지 궁금하다. 실제 소 처리 과정에서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 현실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현안이 요지부동인 상태에서 피해 사실에 대한 적법한 절차는 존재하지 못한다. 개개인의 인식 변화 이전에 시민 연대의 행동과 법 제도의 발현으로 잘못에 대한 가능성과 투명한 사법적 처벌이 가능해져야만 한다.
공론화라는 단어가 장이 아닌 하나의 지점이 되어서 기존의 지평의 어느 곳 정 가운데라도 쪼갤 수 있는 뾰족한 칼침이 되기를 바란다. 더 이상 인류애나 휴머니즘, 인본주의가 유토피아를 대변하는 일은 없다. 매 순간이 암흑과 같은 절멸에 가까운 지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행동과 공감뿐이다.


현정우  kubrick45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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