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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호/사무사] 지금은 들을 떄

편집장l승인201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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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물론 ‘이건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셨겠죠?” 1월 29일 저녁, 서지현 검사가 8년 전의 성추행 피해 사실을 폭로했던 JTBC ‘뉴스룸’ 인터뷰에서 손석희 앵커가 던진 질문이다. 이 질문은, ‘누군가 성추행을 시도한다면 그 자리에서 의사를 표현하고 저항해야 한다’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얼핏 상식적으로 느껴지는 이 전제는 성추행에 숨은 권력 차이를 무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피해자에게 책임과 잘못을 돌리는 역할을 한다. ‘왜 그 자리에서 싫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네 잘못도 있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영화배우 앨리사 밀라노가 헐리웃의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에게 당했던 성폭행을 폭로하면서 시작된 ‘미투(MeToo)’ 해시태그가 전 세계를 휩쓸었을 때, 우린 조용했어요.” 1월 30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진행자 김어준이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보다 1년이나 빠른 2016년 가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SNS를 통해 #오타쿠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시작으로 문단, 영화계, 미술계, 출판계 등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을 폭로 운동이 이어져 왔으며, #문단_내_성폭력 피해자를 지지하는 책 ‘참고문헌 없음’은 소셜 펀딩 사이트에서 6,100만원이 넘는 금액을 지원받았다. 김어준이 ‘우리는 조용했다’고 말한 것은 그가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무지는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 무지는 그동안 그가 여성의 목소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그 무관심을 방송에서 드러내도 아무런 비난을 받지 않음을 의미한다.
“미투(MeToo) 운동에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치지 말고, 내 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절대로 방관하지 않고 나부터 먼저 나서서 막겠다는 미퍼스트(MeFirst)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월 30일, 문유석 판사가 개인 SNS에 올린 글의 일부이다. ‘성폭력을 막고 피해자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작성되었을 이 글은, 역설적이게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가로막는다. ‘미투’는 폭로 여성의 용기와, 같은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지지와 연대가 중심이 되는 운동이다. 그런 자리에서까지 남성의 목소리가 ‘퍼스트’가 되어 발언권을 얻는 것이다. 또한 “나부터 먼저 나서서 막겠다”는 말은 남성의 자리를 가해자, 방관자에서 주인공으로 탈바꿈시킨다.
아마 별 악의가 없었을 그들의 발언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듣지 않음’이다. 남성들은 지금까지 어떤 주제든 -그것이 여성의 문제라고 해도- 쉽게 발언권을 얻어왔고, 그들의 의견은 여성보다 더 큰 무게감과 파급력을 가져왔다. 그동안 여성의 이야기, 여성이 입은 피해는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져 숨겨져 왔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다. 여성들은 언론에서 이슈화하기 훨씬 전부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ㅇㅇ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부터 서지현 검사의 인터뷰,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전국 각계각층 여성들의 폭로까지. 이들은 무력하게 공포에 떠는 피해자도 나약하고 가련한 희생양도 아닌, 가해자와 맞서 싸우는 용기 있는 고발자이자 연대자이다. 미국의 의사 래리 나사르(Larry Nassar)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케일 스테판(Kyle Stephens)은 법정 증언대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녀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려 돌아온다.”
여기, 세계를 박살내기 위해 긴 침묵을 뚫고 입을 여는 여성들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퍼스트’가 되는 건 폭로의 주인공인 여성들이다. 지금 남성들이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뿐이다. 듣는 것. 말을 가로채거나, 평가하거나, 의심하는 대신 최선을 다해 듣고 새기고 바꿔나가는 것. 당신들이 모르고 있었거나, 모른 척 숨겨왔던 이야기를 이제는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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