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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호/사무사] ‘감동권’은 없다

편집장l승인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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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정성은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경향신문에 ‘패럴림픽 중계는 국민의 ‘감동권’ 문제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정 교수는 이 글에서 “감동의 드라마를 TV로 보기가 쉽지 않다”며 패럴림픽 중계 시간을 늘려줄 것을 요구한다. 정 교수는 “역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나로 변신하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패럴림픽이다”라고 말한다. 이상하다. 오랜 시간 땀과 눈물을 흘리며 훈련하고, 그 결과를 경기를 통해 펼치는 것은 올림픽과 패럴림픽 모두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정 교수가 ‘가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패럴림픽의 감동을 강조한 이유는 그가 말한 ‘역경’에 패럴림픽 선수들의 장애도 포함되기 때문일 것이다. 올림픽 선수와는 달리 패럴림픽 선수에게는 장애라는 또 하나의 역경이 있고, 장애인 선수들은 그 역경을 극복했기 때문에 더 감동적이라는 것이다.
‘장애=극복해야 할 역경’으로 인식하는 시선은 사회에 만연해 있다. 지난 14일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언론은 ‘장애를 이겨낸 개척자’, ‘장애 극복의 아이콘’ 등의 표현으로 그를 추모했으며, 이희범 평창 패럴림픽 조직위원장마저 개막식 연설에서 우사인 볼트, 헬렌 켈러 등의 인물을 나열하며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인간 승리를 이룬 표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장애인 전형으로 대학에 지원한 학생들은 면접에서 “역경을 극복한 사례를 들려 달라”는 질문에 어리둥절해한다고 한다. 그들에게 장애는 역경이 아니라 늘 존재해온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장애를 역경으로 보는 태도는 곧 장애인 타자화로 이어진다. 장애인은 역경을 짊어진 불쌍한 사람이, 장애인이 이룬 성취는 역경을 극복한 감동적이고 대견한 사례가 된다. 때로는 성취 그 자체보다 그가 장애를 극복했다는 사실이 더 큰 조명을 받기도 한다. 앞에서 소개한 ‘감동권’ 운운한 글이 그렇다. 이 글에서 장애인이 어떤 경기를 펼쳤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장애인인데 저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다니 대단해’라는 비장애인의 감동만이 패럴림픽 중계를 늘려달라는 주장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저렇게 불편한 사람도 열심히 사는데, 나도 불평하지 말고 더 노력해야지’라는 오만한 깨달음은 덤이다.
장애인을 힘들고 대견하게만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장애인의 모든 행동을 아름다운 것으로 납작하게 곡해한다. 시각장애인의 문자인 점자와 농인의 언어인 수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자(언어)’라고 표현하거나 장애인이 관련된 모든 행사의 제목에 ‘아름다운’을 붙이는 것이 그 예이다. 패럴림픽 역시 개최 기간 내내 ‘아름다운 도전’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장애를 불행하고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멈추자. 장애는 극복하고 이겨내야 하는 역경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감동, 인간 승리 같은 비장애인이 만든 색안경을 벗고, 대견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장애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장애인을 힘들게 하는 역경은 장애 그 자체가 아닌, 장애를 불쌍하게 바라보는 비장애인들의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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