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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9호/사무사] 꽃이거나 꽃뱀이거나

편집장l승인2017.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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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라나요” 박재동 화백이 1992년에 그린 만화의 제목이다. 만화에서 신입사원 ‘미스 김’은 사람이 아닌 꽃으로 그려진다. “괜찮은데?” “싱싱해! 먹음직스러워” “울어? 아니, 귀여워서 한 소린데 속좁게...” 미스 김은 동료들의 성희롱에 시달리면서도 ‘사회생활’을 위해 참고 견디다, 결국 부장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해고된다. 이후 미스 김의 자리에는 미스 박이 들어와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
25년이 지났지만 여성 노동자의 현실은 만화가 발표될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10월 29일 한 포털사이트 게시판에는 사내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발하는 글이 올라왔다. 자신을 가구업체 ‘한샘’의 직원이라고 소개한 글쓴이는 입사 직후 불법촬영과 성폭행을 연이어 당했지만, 사측에서는 사건을 덮기 위해 자신을 협박·회유했다고 털어놓았다. “ㅇㅇ씨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ㅇㅇ씨 몸은 이미 좋다는 신호로 받아들인 거다”는 인사팀장의 말은 25년 전의 만화 속 상황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글이 공개된 이후 SNS에서는 “나도 그런 일을 당했다”는 증언이 쏟아져 나왔다. 회식 때마다 부장 옆자리에 앉아야 했던 신입사원, 노래방에서 상사와 블루스를 춰야 했던 부하 직원, 그리고 격려를 핑계로 가슴을 스치는 손을 모른척해야 했던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 성심병원의 간호사들은 재단 행사에서 짧은 옷을 입고 선정성이 강한 춤을 추도록 강요당했고, 김포공항의 청소노동자들은 용역업체 관리자로부터 폭언과 성추행, 술접대 강요를 당했으며, 한 여성 해군 대위는 “상관에게 성폭행당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교육계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지난 6월 여교사를 과녁 앞에 세워두고 70cm 장난감 활을 쏜 교감은 현재 교장 승진을 앞두고 있다. 회식 자리에서 여자 교감의 허리를 끌어안은 초등학교 교장, “딸처럼 생각한다”며 교사 3명을 성추행한 고등학교 수석교사, 동료 여교사들의 치마 속을 몰래 촬영한 교사, 인턴 직원의 등을 만지고 껴안은 장학사 등 피해 사례는 끝이 없다.
이들은 일터에서 동등한 노동자가 아닌 ‘꽃’으로 취급당했다. 여성을 비유할 때 자주 이용되는 꽃이라는 말은 언뜻 예쁘다는 칭찬으로 들리지만, 그 이면에는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 시각이 깔려 있다. 잘 웃고, 애교 많고, 기꺼이 다른 이들의 눈요기, 또는 성희롱 대상이 되어주는 꽃. 이들은 남자 동료들과 똑같이 ‘일하기 위해’ 직장에 들어왔지만, 근로계약서에는 없었던 ‘분위기를 띄워주는’ 역할까지 떠맡게 된다. 상사나 선배들이 원하는 대로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하면 성폭행을 당해도 할 말 없는 ‘꽃뱀’이 되고, 이를 거부하면 사회생활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배척당한다.
10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권박미숙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활동가는 “여성들이 직장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여자취급’”이라고 말했다. 여성 노동자를 ‘꽃’ 취급하는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한 제2, 제3의 한샘 사건은 언제든 일어날 것이다. 윤단우 작가가 82명의 여성들과 인터뷰한 기록을 담은 책의 제목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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