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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호/영화 도서관] 영화읽기의 필요성

현정우l승인2017.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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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복합적인 예술 매체다. 만들어지는 방식뿐만 아니라 영향을 미치는 방식, 다뤄지는 방식에 있어서도 매우 다원적인 매체이다.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직접 움직이는 존재들, 말, 노래, 춤에서부터 아름다움을 찾아가기 시작하여 움직이지 않는 건축물, 조각품, 회화, 사진까지 그 아름다움의 범위를 넓혀갔다. 그러나 19세기가 끝날 즈음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에 있던 예술, 아름다움의 경계가 조금씩 무너져갔다. 우리가 바로 곁에서 직접 만지고 느낄 수 있던 이전의 예술들과는 달리 영화는 스크린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다가가는 허상으로써의 예술 매체였던 것이다. 만드는 과정에서도 직접 존재를 만들어낼 수 없고, 영사기를 통해 사진을 연속적으로 보여줘야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을 보였다. 영화의 매체적 특성은 사실상 그 탄생부터 드러난 셈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 영화는 관객들을 위한 하나의 거대한 눈속임처럼 여겨졌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비현실 위에서 움직이는 대상들을 보며 관객들은 화면 속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감정적이고 자극적으로 반응했다. 보다 손쉽게 관객을 설득하고 흥분시킬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영화는 혁명을 위한 홍보·선동용 자료로도 활용되었고, 시간이 흘러서 영화의 극적 요소와 정서적 가능성이 탐구됨에 따라 사업으로의 입지도 굳혀갔다. 그러나 이런 영화의 활용과 확산은 약간의 기술만으로도 관객을 자극할 수 있다는 순수하고 강제적인 영화만의 매체 특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결국 영화는 연출된 내용과 편집, 촬영 기술로 우리의 눈을 속이는 속임수라는 불가피한 비판을 들어와야만 했고, 필름에서 디지털로 주도권이 넘어간 21세기에도 그 비판은 ‘연출’이라는 이름 아래에 유효하게 지녀져 왔다.
 영화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일은 그래서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영화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자는 운동은 이미 영화감독들을 중심으로도 강조되어 왔다. 마야 데렌 같은 초기 실험영화 감독들도 편집 기술을 활용해서 장면을 만들어내기 보다 불연속적인 숏을 집어넣는 등 이미지 자체에 집중하도록 영화를 만들었다. 60년대에 일어났던 새로운 영화운동인 누벨바그를 제창한 프랑스의 영화 작가들 역시 갑작스럽게 장면을 전환하는 점프 컷 기법을 통해서 영화에 도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영화 작가들과는 별개로 관객들에게 있어서도 영화에 대한 객관적 판단은 감상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영화 위에 씌워진 편집과 기교, 일시적 정서를 걷어내고 그 속의 본질, 작가의 의도를 드러냄으로써 영화를 더 영화답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정서와 감정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영화를 마주치면서 쉽게 지나친 영화의 구멍 또는 시사점들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영화가 무의식적으로 반영한 폭력, 가치, 이념들을 파악하고 이에 직면하면 사회 전반의 무의식, 스스로에 대해서도 성찰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기’ 이전에 ‘읽는’ 작업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책을 읽을 때와 영화를 볼 때 우리는 모두 작품의 맥락을 따라가면서 작품이 전해주고자 하는 느낌과 감상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책은 글을 어떻게 쓴다 해도 일단 글자가 종이 위에 드러나기 때문에 글을 읽으면서도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행위가 가능하다. 반면에 영화는 편집을 통해서 장면을 구성하는 숏 사이의 틈을 지울 수 있고, 그럼으로써 최대한 숏 사이의 간극을 느끼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숏 하나하나를 따로 떼어놓고 보는 것이 비교적 힘들게 느껴지게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책을 ‘읽는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영화를 ‘읽는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영화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단 영화를 읽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글자를 읽은 다음에 글을 이해하는 것처럼 개별적인 숏을 먼저 보고 나서 이야기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펀트>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1999년에 벌어진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다.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버리거나 그에 대한 감독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고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학교 안에서 할 일을 하는 학생들의 걸음을 담담하게 따라가기만 한다. 변함없는 시선으로 학생들의 뒤를 쫓는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인물의 곁에 있는 듯한 느낌 속에서 쉽게 지나쳐온 폭력들을 조금씩 받아들이다가, 총기와 수류탄을 들고 학교로 들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비춰줄 때부터 사건을 현장 속에서 있는 그대로 느끼게 된다. 영화가 마무리되면 관객은 ‘사건의 원인이 존재할까’와 같은 의문부터 시작해서 영화에 대한 물음, ‘감독은 왜 이 장면을 선택하고, 편집을 이렇게 했을까’ 같은 의문점을 던지기에 이르게 된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받는 충격적인 느낌과 위기감이 영화를 보는 행위의 결과물이라면, 영화가 끝난 후 갖는 의문에서 비롯된 장면 선택과 편집에 대한 의문이 영화를 읽어 나가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영화는 영화 안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더 많은 탐구와 영화 그 자체의 가능성을 통해서라도 영화는 영화를 보는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현실에 있는 우리를 진보시킬 수 있어야 한다. 편견은 판단에 관계없이 존재를 틀로 규정하고 그 틀 안에서만 대상을 바라보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영화 외부와 내부의 편견을 없애고 영화를 가장 영화답게 받아들여 우리 스스로를 포함한 현실에 대해 성찰해야만 한다. 극영화 작가들은 영화를 텍스트 장치로 만들기 위해 장면 사이에, 좁게는 숏 사이에 위계 관계를 형성해 왔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런 부분을 통해서 영화는 본질적인 허구의, 허상의 매체라고 비판해 왔다. 우리는 이렇게 여태껏 영화에 씌워져 온 기술적, 외부적 조작을 걷어내고 영화를 마주해야만 한다.


현정우  kubrick45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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