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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회/수필] 10월 18일 오후

최원구(국어교육08)l승인2013.11.25l수정2015.04.12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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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도 잘 나오지 않았다. 투명한 플라스틱 관 속에 잉크는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뾰족한 펜 촉은 종이 위로 얕은 골을 남기며 지나갈 뿐, 어떤 글자도 의미도 그려내지 못했다. 어쩌면 애초에 글자만을 그려냈을 뿐, 아무런 의미도 적어 내려가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 심에 잠시 고개를 들었다. 물론 고개를 드는 행 동이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책 속의 단 어와 문장들을 눈으로 오려내어 노트에 옮기는 행동이, 밑줄과 동그라미와 화살표로 그것들을 장식하고 연결하는 행동들이 정말로 지식의 축 적과 연결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책 에 적힌 글자들 위로 형광펜이 지나간 흔적들, 노트에 이식된 글자들 사이로 움직여 다니는 화살표와 밑줄들의 이질감이, 마치 종이 위에 양각되어 있는 것처럼 두드러지면서 생소하고 낯설게만 느껴졌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책상 앞에 엉덩 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던 시간이 생각만큼 길 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하고, 그렇지 않 기도 했다. 이만큼을 공부하기 위해 – 혹은 공 부했다고 믿기 위해 걸린 시간이 생각보다 적 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공부하는 일에 – 혹 은 공부했다고 믿는 일에 제대로 마음을 붙이 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책을 읽고 지식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밀어 넣을 때마다, 4학년이 되도록 모르고 있던 지 식이 이렇게나 널려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기 만 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지닌 알량한 지식의 범주가 미세하게 확장되며, 또 다른 알지 못했 던-그러나 알아야 하는 지식들과의 접점이 커 진다는 사실 역시 불편함을 증폭시켰다. 견고 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메마른 지식과 구절 들을 눈으로 찍어 내는 일들이 달갑지 않았고, 밑줄을 긋고 메모하는 행동들이 과연 가치 있 는 일인가 미심쩍었다. 어제가 오늘이 되었고, 오늘이 내일이 될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조차도 예정된 종말을 기다리는 듯만 하여 부담스러 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괴로움과 미심쩍음, 불 편하고 달갑지 않은 마음들 모두를 거슬러 올 라간 끝에는 이 모든 것이 변명이자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동일 뿐이라는 냉정한 판단이 벽처 럼 서 있었고, 어쩔 수 없는 무력감이 언제나 마침표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러는 동안 수요와 공급, 예산과 절차를 두 루 고려하여 대승적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결정 된 소식들이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시도별로, 과목별로 나누어진 소식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교육청 홈페이지 보도 자료에서 각 언론사들 로 퍼져나갔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몇몇 적극적인 사람들은 그보다 한 발 앞서 그 소식 들을 인터넷 게시판으로, 카카오톡 채팅방으로 실어 날랐다. 마찬가지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나 조금은 덜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은 댓 글을 달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게시물의 조회 수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철저한 분업화는 이 이슈로 인한 불안과 초조를 확대 재생산하는데 매우 효율적으로 기능했으며, 그 소식들은 신 문 1면이나 포털사이트 메인을 장식하지는 않 았지만, 사람들 사이로 미끄러지듯 번져나갔다.
사람들은 안부를 묻듯 인사를 하듯, 걱정스 레 숫자들을 물어보았다. 함축적이었지만, 누 구도 질문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았다. 거긴 몇 명이나 뽑냐. 타인의 소식을 위안으로 삼으려 는 심리와, 자신의 하소연을 들어 줄 상대를 찾으려는 심리가 교묘한 접점을 이루었다. 몇 몇은 술렁이고, 몇몇은 낙담했다. 술렁이고 낙 담하는 것이 그저 자신의 운에 달려있을 뿐이 라는 사실에 또 다시 몇몇은 술렁이고, 몇몇 은 낙담했다.
수요와 공급, 예산과 절차를 고려한 대승적 판단이었지만, 사람들에게 그것들은 너무도 가 늠하기 어렵고 멀리 있는 ‘어떤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그것들을 그저 ‘운’이라고 부를 수밖 에 없었다. 모두들 그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 다고 생각했으며, 사람들은 ‘수요와 공급, 예산 과 절차를 고려한 대승적 판단’이 자신을 외면 했다는 말 보다는, 그저 ‘운’이 없었다는 말로 자신의 실망감을 어떻게든 때워 넘겼다. 다행 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은 올해 자신을 찾아온 ‘ 운’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가슴 을 쓸어내렸다.
지난 6월 ‘2014학년도 공립 중등학교 교사 임용후보자 선정경쟁시험 사전 예고’라는 이름 으로 발표되었던 불안과 초조가 그렇게 갱신되고 있었다. 좌절하는 사람과 만족하는 사람, 예상한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무표정한 사 람들이 있었고, 그 사이로 불안과 초조와 긴장 이, 계산과 예측들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하지 만 지금 느끼는 절망 혹은 환희가, 기숙사 식당 의 저녁 메뉴를 확인하고 느끼는 감정보다 크 게 다루어져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을 모두들 숙 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화기를 꺼내어 술친구를 불러내는 사람이나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찾는 사람들 모두가, 적어도 내일 아침에는 틀림없이 책상 앞에 앉 아 있을 것이다. 다들 무엇이 중요한가를 생 각할 수 있을 정도로 이성적이었기 때문이고, 새벽과 저녁이, 끼니와 끼니가 맞물려 돌아가 며 찾아오듯 잠시의 소요가 찾아왔다고 여기 는 것 같았다. 캠퍼스의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고 찬 공기에 어둠이 섞여들면서, 낮 시간 잠 시 요동치던 불안과 초조는 다시금 단단한 지층처럼 퇴적되어갔고, 지층 속에 갇힌 화석처 럼, 사람들은 또다시 찾아온 끼니를 갈치조림 과 구운 김, 바나나 후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최원구(국어교육08)  knuepres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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