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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호/얼렁뚱땅 문화살롱] 기도하는 망각의 동물

김성치l승인2016.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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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것을 병 속에 집어넣고 잊어버렸다.”
「망각의 동물」 심은영
                                      
  모두가 병에 걸렸다면 이미 그 병은 병이 아니다. 감염자들의 세계 안에서 면역체계를 가진 극소수의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쉽게 표적이 된다. 패러독스가 기승을 부리는 공기는 이처럼 매우 사납고 공격적인 성향을 세차게 뿜어내며 모두에게 간섭한다. 그저 고통스러운 기침을 하며 참아내는 것만이 합당하다는 믿음. 가래 끓는 기분 나쁜 목소리만이 공허를 찢을 뿐 그 외의 다른 소리는 숨죽일 수밖에 없다.
 행복을 질투한다고 착각해선 안 될 일이다. 그들은, 어쩌면 커다란 확률로 우리는, 행복을 증오하는 대담한 인간이기를 아주 오래전에 포기했다. 우리는 그저 불행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그동안 버텨온 불행의 씨앗은 우리 창자에 아주 깊숙이 박혀 있어서 애초에 꺼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수구 습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듯 불행은 그 누구도 모르는 시간에,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은 공간에서 자랐다. 정수리 위로 거대한 불안과 갈증의 꽃을 피우는 불행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추악한 뿌리를 잘라내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자 모두가 그의 숨통을 끊어버렸다.
 감염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여야겠다.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아마 면역체계에 관한 설명이다. 면역체계는 누가 가지고 있단 말인가? 병균을 거부하는 성질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 거야? 눈물겹게도 이런 궁금증은 오만한 것이다. 당신에게서 면역체계를 빼앗아 버린 것은 바로 당신이다. 순수함에 대해 돌이켜보자. 종교가 돈이고 돈이 종교인 줄 아는 이들과는 달랐던 때, 지금보다는 어리고 유약하던 때 당신의 새하얀 안구에는 어떤 세상이 담겨있었는가? 기억할 수 없을 만도 하다.
 망각의 동물로 전락한 우리 안에 끊임없이 샘솟는 것은 순수함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아직 망각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살인충동이다. 이건 약간 무서운 이야기인데, 실화다. 수백 명의 어린 생명들을 수장시켜버리고 도망친 인간들이 있다. 어른이라고도 부른다. 이건 무서운 이야기인데, 실화다. 처참한 살육이 끝나고 나서 모두가 침묵했다는 것이다. 실화다. 시간이 흘러감에 무심했던 멍청하기 짝이 없는 네 녀석이 숨만 쉬던 시절 있었던 일이다. 그때쯤에 나는 뜬금없이 귀를 후비거나, 발톱을 깎았을지도 모른다.

“해부해 보니 소화계가 사라져 있었다.”
「망각의 동물」 심은영

“어머니, 위대한 시인이 되고 싶어요, 아무것도 될 게 없으니”
「기도」 강정

 갑자기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시끄러워. 극성맞은 어머니일 가능성 15%, 아버지는 늙고 지쳤으니 주무시겠지. 술을 들고 온 모자란 이웃일 가능성 8%, 물론 술은 마시기에 대단히 적합하다. 아이를 잃고 몽유병에 걸린 회사원일 가능성 5%, 나는 이건 무섭다.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세상 모든 여자를 김치녀라고 부르기 시작한 친구 놈일 가능성 4%, 이 녀석은 갇혔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친구일 가능성 3%, 요샌 자지 보지가 몽땅 문제라고 한다, 헌데 나는 그것들 없이 살아간다는 게 막막하다. 자신이 몇 등급 소고기인지를 가늠하며 환부에 도장 찍는 수험생일 가능성 2%, 너무 지긋지긋해서 나를 미쳐버리게 만들 것이 분명한 파도치는 소리 1%. 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쪽지가 담긴 병이 도착.
 어머니 나는 시인되기를 그만둘래요. 그렇게도 책 좀 그만 읽으라고 성을 내셨죠. 몇 년 전엔 밥상머리 앞에서도 맨날 시 쓰겠다고. 할머니는 제 입맛이 변한 줄도 모르고, 밥이 맛이 없는 줄 아시고 계란 후라이를 꺼내 놓으셨는데. 실은 책 읽느라 그런 건데. 할머니는 선인장을 기르셨잖아요. 선인장에도 꽃이 핀다는 걸 그렇게 처음 알았는데. 제가 처음 상복을 입을 때 넥타이를 매준 사람이 장의사였던 거 아세요. 그 사람 입술 사이로 시체 냄새가 흘러나왔는데. 더러운 방 벽엔 야한 사진이 걸려 있었어요. 좀 웃겼는데.

“넌 네 말을 하지 마 널 속이지 마”
「기도」 강정

 죽기 전까지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들어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만 이어가고 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끝내 떨어져 버릴 것을 이젠 어렴풋이 짐작한다. 그러나 긴 역사 속에서 줄타기에 실패한 곡예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곡예사는 발을 헛디뎌 떨어진 순간 죽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은 곡예사일 수 없다.
 초췌한 글을 위해 그간 지면을 마련해준 신문사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나는 어딘가 망가진 사람이라 글만이라도 아름답기를 바랐는데, 뒤로 남겨진 문장들은 틀림없이 나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뜻대로 되질 않는다. 보잘 것 없는 나에게 과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진 모두에게 감사하다.
 어느덧 다시 겨울이다. 처참한 바다 위로 또 얼마나 많은 눈이 내릴 것인가. 손이 언 새벽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었다. 너무 춥다. 미열은 꽤 오랫동안 날 따라다녔다.


김성치  knuepres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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