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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호] 소잉카 연극과 탈식민주의 그리고 기시감

이석호(카이스트 대우교수)l승인2016.11.21l수정2016.11.22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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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카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거머쥔 소잉카 연극의 특징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특성을 일별해보자면 대강 ‘근대성 비판’ 정도로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서구 정전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 전통의 현대적 전유에 대한 줄기찬 관심 그리고 아프리카의 탈식민화를 견인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 등속에서 그는 서구식 ‘근대(성)’에 대해 일말의 거리감을 노골적인 형태로 드러낸다. 소잉카의 서구식 근대에 대한 비판은 궁극적으로 아프리카의 자발적 근대가 성취 가능한 과제인가라는 물음과 맞물려있다. 소잉카 연극은 여러 가지 층위에서 아프리카가 자발적으로 근대를 간취해내는 일이 지난하긴 하지만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님을 역설한다.
소잉카가 서구의 근대를 비판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연극적 자원은 무궁무진하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적 시간관의 파괴, 열린 공간에 대한 막역한 애정, 서구식 연극 내러티브의 해체,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 류의 연극문법에 대한 강한 부정 등이 그 내용의 주종을 이룬다. 소잉카에게 연극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시간과 공간은 고정되고 화석화된 사유 이전 혹은 그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즉물적으로 변주가 가능한 주물의 대상일 뿐이다. 소잉카는 이 즉물적 시, 공간의 자유자재한 주물을 통해서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불가역성의 원칙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불연속성도 의도적으로 방기한다.    동시에 주로 등장인물의 대사에 의존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서구식 근대 연극의 내러티브보다는 삼라만상 모두를 내러티브의 주체로 호출하는 범신론적 세계관을 선보인다. 물론 소잉카의 범신론은 아프리카의 구전 전통에 크게 빚지고 있다. 게다가 연극의 삼일치론과 카타르시스론 등을 통해 서구 근, 현대 연극의 원형적 전통을 구축했던 아리스토텔레스 류의 연극문법을 전향적으로 거스름으로써 아프리카 연극의 탈식민화 가능성을 진지하게 검토한다.
『여로의 변신』은 소잉카가 1960년 대 이바단에서 초연한 『여로보암 형제의 시련』을 연작 형태로 쓴 작품이다. 『여로보암 형제의 시련』이라는 작품이 나이지리아의 독립을 전후로 해 사이비 종교와 부패한 권력의 담합을 다소 맹아적인 형태로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라면, 『여로의 변신』은 그로부터 십 삼년이 지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정부 나이지리아의 한 왜곡된 근대 상을 아이러니칼하게 패로디하고 있는 작품이다. 재미있는 것은 십 삼년의 간격을 두고 쓰인 이 두 작품이 식민주의의 유제로 남겨질 혹은 남겨진 근대의 문제를 해석하고 수습하는데 있어서 거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근대라는 부정적 유제를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로의 변신』은 독립 이후 진정한 탈근대로의 ‘변신’의 희망이 좌초된 신식민지 아프리카를 다소 자학적으로 심문하고 있는 텍스트라고 볼 수 있다.
여로의 변신이 부정적 의미의 변신임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은 여로보암이 ‘바 비치’(Bar Beach)에 있는 사교 교주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놓고 그곳의 위기 국면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장면이다. 여로보암과 같은 사교 교주들이 들끓는 ‘바 비치’를 국립 공개 사형장으로 바꾸어 그 주변에 위락시설을 유치함으로써 관광 세수를 늘리려는 꿍심을 가지고 있는 시 당국에 대항해 생존권 사수를 내걸고 여로보암이 나선 것이다. 여로보암은 이 위기 국면을 ‘발전’의 한 계기로 바꿀 줄 아는 뛰어난 지략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는 ‘발전’이란 것도 그리고 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사용하는 ‘지략’이란 것도 매우 속물적인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만장하신 동료 목자 여러분! . . . 아시다시피 이곳 ‘바 비치’는 지금 온갖 프로젝트들 투성입니다. 도박장, 카지노 등을 비롯해 이곳에 위락시설을 유치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란 말입니다. 돈의 노예들은 지금 이곳에 그 몹쓸 놈의 유흥업소 만들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 . . 이곳에 유흥업소가 들어오면 우린 어떻게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종교적 사명은 어떻게 되느냔 말입니다. 아마  그 더러운 돈의 제단 앞에 제물로 바쳐지지 않겠습니까?”
‘바 바치’의 사교 교주들을 모아 놓고 여로가 논의하고자 하는 ‘발전’이란 ‘영적 카르텔의 결성’임이 이내 드러난다. ‘바 비치’에 국립 공개사형장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그곳의 사이비 교주들을 축출하려는 복안을 가진 시 당국을 대상으로 어떻게 하면 시 당국의 복안은 복안대로 지지하면서 자신들의 이권은 이권대로 챙길 것인가가 ‘발전’을 둘러싼 논의의 핵심 내용인 것이다. 여로의 묘안은 앞으로 국립 공개사형장에서 치러 질 대대적인 사형 장면의 상품화를 통해서 그 해프닝을 보러 오는 관객들을 대상으로 관광 세수를 늘리는 이권은 시 당국에게 넘겨주는 대신, 그곳에서 스러져갈 망자들의 넋을 위무하는 일을 일임함으로써 축출의 위기를 모면함과 동시에 일말의 떡 고물도 챙기자는 것이다. 죽음과 주검의 해프닝화 혹은 상품화를 통해 권력과 종교의 세속적 담합이 매개되는 것이다.
죽음이나 주검의 상품화는 진정한 의미의 탈식민지화가 좌절된 신식민지 나이지리아의 총체적 파국을 의미한다. 이 점은 여로가 품은 변신의 욕망에서도 잘 나타난다. 여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지문에 보면 여로의 방 안에 마이크를 앞에 놓은 군인 복장을 한 사내의 사진이 걸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문은 여로가 이 사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이 동일화의 욕망은 여로가 시 당국에서 나온 관리와 타협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제 방으로 돌아가 군인 복장을 한 사내의 사진을 제거하고 그곳에 군인 사진보다 더 큰 자신의 제복 입은 사진을 당당하게 걸어두는 대목에서 완전하게 성취된다. 이것은 권력과 종교의 밀실 야합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다. 소잉카는 이 변신의 욕망이라는 상징을 통해 거의 광신과 사교 수준에 이른 권력과 역으로 치유할 수 없는 독재 및 ‘영적 부패’의 수위에 다다른 종교를 대위법적으로 비판한다. 식민지 근대가 남긴 부정적 유제를 말끔히 청산하지 못한 신식민지 나이지리아에 대한 아픈 고발이다.
반 세기 전에 아프리카의 한 작가가 쓴 희곡 안에서 21세기 한국의 그림자가 자꾸 어른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석호(카이스트 대우교수)  knuepres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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